우리 국민들은 우리를 소중화 국가로 착각하고 거란족과 몽골족,
여진족을 오랑캐라 부르거나 혹은 무감각하게
원나라 청나라(후금)를 중국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실은 그들은 중국이 아닌 것이다.
청나라 황족 황실은 대대로 몽골족과의 결혼을 장려했지만
漢족과의 결혼을 기피했다.이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인가?
금나라를 세운 여진왕족 완옌씨의 시조가 고려인
김함보라는 것은 금사,대금국사에 모두 나오는 역사적 사실이다.
지금의 중화공화국은 원나라,청나라를 계승한 것이
아니라
송나라,명나라를 계승한 나라이다.
미국이 인디언족 나라를 계승한 국가라고 하면 모두 실소를 금치 못할 것이다.
그와 같이 지나족과 몽골족은 너무도 다른 민족이다.
중국의 정체성은 바로 漢족(국민의 90% 점유)의 정체성이고
그러므로 청나라나 원나라는 중국이 아닌 것이다.
우리와 원나라 혹은 우리와 청나라(후금) 간의 전쟁은 배달 동족간의 전쟁이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부터 요,금,원,청을 중국으로 부르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요,금,원,청은 북방아시아계 고조선 배달족의 일원으로우리의 동족이었던 것입니다.
원나라,청나라의 역사는 결코 중국의 역사가 아니다.
북미 인디언의 역사가 미국의 역사가 아니듯이...
요,금,원,청의 역사는 바로 우리의 역사인 것입니다.
발해(대진국)망하고 옛 해땅에 부흥운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서편엔 거란족이 요나라를 세워 확장하고 있었다
발해땅에 금이 건국되었다.
금은 고구려,발해를 계승한 나라이다.
금은 강력한 요나라를 멸망시키고 송나라를 반이나 집어삼켰다.
반으로 쪼그라들기전의 송나라를 북송이라고 하고 북쪽지역을 빼앗겨
남쪽에 세운 망명정부가 남송이다.
(펌)
발해가 거란의 요나라에게 920년경 멸망한 후 200여년간이나 발해의 독립운동가들에 의해 부흥운동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많은 나라가 발해계승국이라고 자처하며 건국되었다 살아진다. 특히, 후발해국이나 정안국 그리고 후고구려 등은 나라의 존속 기간이 70~80년이 되는 등 국가적인 모습이 나타났으며, 마침내 1115년 금나라가 건국하였다.
전주에서 기고한 바와 같이 명백히 금나라는 우리의 북방민족역사에 속한다. 그런데 우리는 중국인들의 세뇌와 일제의 간악한 식민사관으로 금나라가 우리와 전혀 다른 이 민족이 세운 나라로 보고있다. 금나라의 건국시조는 신라인 김함보의 6대 손이라고 금사에 적혀있고 건국세력은 모두 발해의 독립운동세력 즉 발해의 지배세력이었다.
금사에도 나오듯이 금의 황제들이 모두 신라김씨이고 황후들은 모두 발해왕족 대씨이며 금의 주요 정치 세력을 형성하였다. 윤관의 고려의 북방 만주지역 영토 개척이 급속히 진척된 이유 역시 발해인들이 협조했기 때문이다.
고려사 윤관 전에 보더라도 여진인은 옛 고구려 백성들이다라고 나오고 있다. 중국인들의 사서에 등장하는 미개한 말갈인들은 결코 현 중국의 3분의 2를 차지하는 대금국을 건설할 수가 없다. 금나라는 당시 지구상에서 가장 전투력이 강한 요나라를 멸망시키고 중국 지역까지 진출 송나라를 양자강 이남 조그만 구석으로 몰아내고 대부분의 중국영토를 차지하였다. 한번도 국가 통치 능력이 없는 민족이, 특히 미개 민족이라고 불리워진 말갈인이 국가라는 관료 조직을 형성하고 통치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 배달민족의 부흥을 두려워한 중국사관들의 의도적인 역사왜곡인 것이다. 금의 건국에는 국가 통치 경험이 있던 발해인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 증거로 금나라의 통치 기간 동안 발해 유민의 광복활동이 전무하다는 것이다.
요나라 시절 끊임없이 반요의 독립 투쟁을 주도하던 발해인들이 금이 건국한 후 더 이상 광복 운동이 일어나지 않는다. 시대상으로 금의 건국이 발해 멸망 후 200여년이 지났지만, 당시 요동에서는 고조선과 고구려 그리고 발해의 계승권을 주장하는 대발해국이 건국하여 요나라와 전쟁을 하고 있었다.
이런 발해인들이 금나라 건국 후 반금 운동이 전무했던 이유는 바로 금나라가 우리와 다른 민족이 세운 국가가 아닌, 발해를 계승한 같은 민족이기에 가능한 것이다. 오늘날 발굴되는 발해와 금나라의 주거문화 형태를 보면 우리와 똑같다. 금나라 시대에 들어와서 온돌이 보편화되었다.
민속학 주거문화 연구자인 한규철 교수님은 주거의 보수성이 각 민족의 전통성을 보여준다고 하였다. 온돌은 우리 민족의 고유한 주거 문화 형태이다. 그런데 금나라 사람들이 온돌을 썼다는 것은 곧, 우리 민족과 같은 민족이라는 이야기이다.
고구려 계승 국가는 발해이며, 발해를 계승한 국가는 금인데 어떻게 발해사만 한국사에 포함되고, 금사는 중국사가 되었는지 깊이 생각해야 한다. 역사를 잃어버린 민족은 갱생할 수 없다. 금사의 민족사 복원은 바로 우리민족의 잃어버린 정신의 한 부분을 되찾고 과거 조상들의 원한을 풀어주는 해원(解寃)의 의미를 갖고 있다.
. 여진족
1.여진족은 대체로 발해의 유민을 가리키는 말인데 발해를 구성하는 가장 큰 민족은 속말말갈족이었습니다. 흑수말갈이 발해의 영향권을 벗어나 있었음에 비해 속말말갈족은 고구려인과 적극 연대하여 발해를 건국한 세력입니다. 따라서 여진족에는 속말말갈인들과 고구려 후예들의 피가 섞여 있다고 보는 편이 좋습니다.
.2. 금나라와 신라?
금나라 왕조의 시조인 아골타가 신라인의 후예라는 사실은 상당히 설득력있는 이야기이며 사실일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다만 왕조의 시조가 신라인이라 하더라도 여진에 귀화한 지 여러 대에 걸쳐 세력을 쌓았고 아골타 자신이 여진의 족장이었음이 분명하므로 그다지 썩 의미있는 이야기는 아닐 것입니다.
다만 금나라 자신이 고려와 상당히 동질감을 느꼈고 여진족이 줄곧 고려와 친근한 관계를 유지하였는데 이것 때문에 시조설화가 조작된 것인지 아니면 시조의 관계 때문에 더욱 친근한 관계가 된 것인지 선후관계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여진족과 고려는 거의 혈맹 관계에 있었다고 보면 맞습니다.
3. 이성계는 여진족?
조선 태조 이성계의 족보에는 이성계의 조상이 고려 전주 출신임을 명확히 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고려인이었는지 아니면 고려에 귀화한 여진족이었는지 아니면 여진에 귀화한 고려인이었는지 알 수야 없겠지만 적어도 공식적으로는 조상 때부터 고려인이 맞습니다. 다만 여진족의 영토에서 오랜 동안 거주하였기 때문에 여진족의 피가 섞여 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4. 함경도 주민은 여진족의 후예?
가능성은 반반입니다. 우선 함경도를 차지하게 된 것이 고려 공민왕 때와 조선 세종대왕 때입니다. 공민왕 때야 함경도를 정벌하여 우리 영토로 귀속시키게 되었습니다만 이때까지 함경도 지방에는 주로 여진족이 더 많았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러나 조선 세종 대에 이르게 되면 사민정책이라는 것을 통해 경상도 주민을 대거 함경도로 이주시키게 됩니다. 그리하여 함경도를 영구적으로 조선 영토로 만들어 버리게 됩니다. 이때 기존 함경도 거주 여진족들을 완전히 몰아냈다고 보기는 어렵기 때문에 아마도 여진과 조선인 간의 혼혈이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러나 당시에 여진족과 조선인들간의 친근한 관계로 보았을 때 이 정도는 혼혈이라고 보기에도 좀 거시기한 상황이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여진과 고려 혹은 조선 간의 관계는 역사상 적대관계였던 적을 찾아보기 어려울 만큼 친근한 관계였고 여진 출신 퉁두란이 이성계의 최측근으로서 이지란이라는 이름을 하사받아 왕족의 대우를 받았던 점 등으로 미루어 볼 때에도 두 민족간의 관계는 각별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여진 혈통 내에도 고구려, 신라, 고려인의 피가 섞여 있을 뿐 아니라 고려, 조선인들 역시 여진족과 누대에 걸친 혼혈관계를 맺어온 사이이기 때문에 굳이 혈통적 순수성을 따지기가 어렵습니다.
다만 여진족 사회에서 자리잡은 사람은 그냥 여진족으로 보고 조선 사회에서 자리잡은 사람은 조선사람으로 보는 것이 더 합당하지 않을까 합니다. 제 말씀은 그 조상의 혈통적 순수성을 따지기보다는 문화적으로 사회적으로 어떠한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가는가 하는 점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죠. 즉, 아골타는 여진족으로 이성계는 고려인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는 점이죠.
흔히 잘못 알고 있는 사실 하나를 짚고 넘어가고자 합니다.
'단일민족'의 정의는 어떠한 혈통도 섞이지 않은 순혈적인 종족을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그러한 혈통은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섞였기 때문에 단일민족입니다. 섞이지 않으면 다민족국가인 것입니다.
만약 흑인과 백인이 완전히 섞여 구별하기 어려울 정도가 된다면 미국은 단일민족 국가가 됩니다. 그러나 지금 흑인과 백인은 확연히 구별되고 서로 잘 섞이지 않고자 하는 경향이 더 강하기 때문에 미국은 다민족국가로 남아있는 것입니다.
우리 나라는 오랜 역사 속에서 다소 혼혈도 있었지만 약간의 혼혈이 있더라도 곧 흡수될 만큼 강력하게 동화되어온 역사이기 때문에 단일민족이 맞습니다.
신라와 백제가 아무리 혈통적으로 비슷하다 하더라도 끝내 섞이지 않았더라면 다른 민족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섞였기 때문에 하나의 민족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단일민족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조상이 하나이기 때문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하나이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단일민족 여부는 과거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재에 있다는 것입니다.
출처-네이버 지식
* 별첨1
이성계 집안은 만주로 도망간 고려인의 후손입니다.(전주이씨라고는 하나 조선왕조실록을보면, 조선시대 내내 전주를 본향으로 여기면서도 실제적으로는 비호의적인 언사를 계속 발언하지만, 함경도는 왕가의 고향으로 여기고 함경도인에게 이상하리만큼 관대한 언사를 계속적으로 내뱉는다.)13세기이후 만주에서 거주했고 그곳 고려인들은 만주인들과 거진 다름없는 자들이었으니 이성계집안도 혈통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여진족이라고 해도 진배없을 것입니다.
사실 광화문의 이순신 장군의 갑옷과 투구는 이성계가 도입한 조선왕조 군대의 여진족 갑옷입니다.이성계 이전의 고려군대과는 완전히 틀립니다.군제도 몽골이나 북방군제로 조선왕조이후에는 많이 바뀌게 됩니다.(뭐,이건 이성계가 데려온것은 아니지만 제주도 조랑말도 사실은 거의다가 몽골말입니다.국민대표주 소주도 몽골술이죠.원래 한국술은 일본 정종처럼 약한 도수의 술이었습니다.)
참고로, 여진족중에는 조선왕조실록에 보면 김씨도 상당수 있었는데,, 아마도 금나라를 세운 왕조가 신라출신이라고 금사에 적혀있는것과도 무관하지 않을수도 있습니다.
이성계 부하들도 여진족이 심하게 많았는데 대표적으로 청해이씨를 들수있습니다.청해이씨는 조선의 명문가로 변화되었으며, 여진족퉁두란의 후손인데 이성계의 사촌여동생과 결혼했습니다.(이성계가 거의 강제로 퉁두란을 장가보내게 했습니다.퉁두란이 미소년이기도 했지만 퉁두란의 무공에 감탄한 이성계가 혼인을 맺어 자기 부하로 삼을려고 한것입니다.)
즉, 이성계가 데려온 여진족들이 백정으로 돼었다기 보단 조선왕조실록에 보면 군대에 편입했다고 적혀있습니다.사실 세종,세조때 기록까지도 만주나 함경도에서 여진족을 새로 모집해서 친위대(숙위)에 편입시켰다는 기록이 많이 나옵니다.아니면 함경도에 그대로 계속 살았습니다.
조선초기에는 여진족들을 군대에 편입을 많이 시켰고 자원자들도 많았습니다.물론 여진족들이 다 군대 편입한것은 아니고 간나(간나새끼의 어원),오랑캐(울량합)족등 여러부족들이 건너왔으므로 그중에 백정으로 된 부족들도 있겠습니다만,,,상당히 많은 대다수의 경우 그냥 함경도에서 조선정부로부터 관직을 받아 지방 토호화 합니다.
현재의 함경도인은 여진족의 후예라고 보는게 맞을 겁니다.함경도 사람들은 절대로 그렇게 말안합니다만, 왕조실록에 보면 북방 이주시킨 삼남 백성들 90프로 이상이 도망쳐 남쪽으로 다시 왔다고 써있으니 함경도 토착 여진족의 영향이 지역에 강할것입니다.
게다가 기록에 보면 함경도 지방에 거주하던 조선인이나, 고려인들은 여진족과 심하게 통혼해서 서로 구분하기 힘들었다는 기록이 계속 나옵니다.
함경도 지방은 토관이라고 해서 지역주민이 관리를 맡았습니다.일종의 지방자치제입니다.
함경도 지역이 한반도 인구의 15프로는 넘을 것이니,, 조선시대에 엄청난 한국의 인종변화가 있었단 얘기입니다. 아리랑도 여진 민요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죠.
우리나라에 여진족 유입이 중단된것은 17세기 이후로 청나라가 건국되어 중원으로 여진족들이 이주해갔기 때문이라고 왕조실록에 적혀있습니다.
그전까지는 왕조실록에 숱하게 여진족 이입기사가 나옵니다.
여진족은 함경도에만 국한된게 아니라 조선왕조가 정책적으로 경기도,경상도,전라도 지역으로 이주시킨경우도 꽤 많습니다.(하도 북쪽에서 식량문제로 난리치니까 남쪽에서 먹고살라고 아예 이주시킨거죠)
13,14세기 여진족이 살던 만주지역은 몽골제국의 영토중일부였으며 사실 몽골제국이 힘이 약해져서 고려왕조로 이성계와 이성계의 아버지인 이자춘이 넘어오기 전까지, 만주,함경도 지역에서 이성계 집안은 몽골에 충성해 몽골관리도 했습니다만, 천호장이란 직책인데 이시기에 분명히 몽고 문자를 배웠을 겁니다.
집필자 : baronred
“금나라 역사는 한국사이다”
<펌>
''중화민족''은 사실 비교적 최근(중국공산당 집권 이후)에 나타난 새로운 개념이다. 현재 중국의 영토에 사는 모든 민족은 모두 ''중화 민족''이란 것. 이 ''중화 민족''은 역사학이라기 보다 대륙의 다양한 소수 민족을 포섭하려는 중국공산당의 정치적 이해를 위해 만들어진 개념인 것이다. 이런 ''우악스러운'' 중화민족 개념에 대항하려면 우리도 본래의 ''단일 민족'' 개념을 새로 짜야하는 것은 아닐까. 그것은 여진, 거란 등의 북방 민족을 한민족(韓民族)의 테두리와 융화시키는 것일 터이다. 더욱이 이런 방식은 ''중화 민족'' 개념 보다는 문화, 인종, 생활방식의 유사성 등에서 훨씬 타당성이 크다.
그럼 여진 등의 기마 민족과 ''한민족(韓民族)''의 역사적 관계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역사학자 이덕일씨는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에서 공을 세운 부하의 4대 후손이 누르하치라고 밝히면서 여진족, 몽골족 등과 조선의 관계를 조심스럽게 정립한다.
"이제 단일 민족 국가라는 개념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을 성공적으로 감행할 수 있었던 원천은 바로 여진, 몽골 등의 기마 민족 덕분이었습니다. 동이족이라 불리던 유라시아 반도 동북부는 그렇게 서로 뒤섞여 살았던 것입니다. 고구려 영양왕은 거란족, 말갈족을 거느리고 수나라에 대항해 싸웠고 발해에서는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들이 함께 살았습니다. 또한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할 수 있는 발판이 되어준 기마 부대원들도 거란, 여진족들이었지요. 심지어 여진족은 조선에 귀화하면 벼슬을 주고 조선인으로 인정해 주기도 했습니다. 혈통이 어찌 되었든 함께 어우러져 살았으니 ''우리 민족''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배달회 오정윤씨는 민족개념에 대해 훨씬 급진적인 주장을 펼친다. ''동이족(東夷族)''에 거란, 여진, 몽골 등을 포함시키는 것이다.
"거란은 ''알''을 의미하는데 부화하기 전 알의 색상은 황금색입니다. 즉, 밝음을 추구한다는 의미로 배달 민족의 ''배달, 박달(밝은 들)''의 의미와 같습니다. 또한 여진은 고려의 ''려''와 발해의 원래 이름인 ''진(震)''을 합해 여진이라고 한 것으로 몽골어로 밝은 온누리라는 의미에요. 또 몽골인들은 지배자를 ''칸''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칸''은 ''삼한''의 ''한''과 같습니다. 무엇보다 동이족들은 똑같이 밝음을 숭배하고 하늘의 자손과 땅의 자손이 만나 천지를 새로 만들 아이를 잉태하는 거의 비슷한 신화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동이족에 포함된다는 민족들의 인류R26;신화학적 공통점들에 대해 이야기하다 진지한 표정으로 고구려와 발해에 대해 말을 이었다.
"고구려는 전성기 때 몽골, 거란, 여진과 같은 여러 북방 민족을 통치했습니다. 고구려가 망한 이후에도 발해가 이들을 상당수 흡수해 서로 공동체가 되었고요. 교과서에는 발해의 지배층이 고구려인이고 피지배층이 말갈족, 즉 여진족이라고 나오지만 함께 오랜 세월을 지낸 사람들이 어떻게 다른 민족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실제로 한국인들은 발해를 민족사에 포함시키는 교육을 받고 있다. 물론 이렇게 된 것도 조선 후기 학자인 유득공이 ''발해고(渤海考)''에서 발해를 우리 역사라고 주장한 이후부터였지만 말이다. 그 이전까지는 발해를 말갈의 나라로만 여긴 것이다. 그러나 발해가 민족사에 포함된다고 주장하려면, 발해를 구성했던 사람들, 특히 말갈인들도 한국인의 조상으로 보는 편이 훨씬 논리적일 것이다.
신라 마지막 왕자인 마의태자의 후손임을 주장하는 부안 김씨들은 그들의 ''족보''를 내세워 ''금사'', ''만주원류고'', ''송막기문'' 등의 내용을 이렇게 뒷받침한다.
"함보는 법명이고 그의 본명은 김행 (혹은 김준)으로 마의태자 김일의 아들이자 경순왕 김부의 손자이다. 김행은 여진으로 갔지만 다른 두 형제는 고려에 남아 부안 김씨의 시조가 되었다."
금나라의 역사서 ''금사''와 거의 대부분 일치하는 주장이다. 다만 금나라를 세운 아골타가 김준의 직계 아들인지 몇 대를 거친 손자인지는 의견이 다양하다. 어느 것이 옳다고 딱 잘라 말할 수 있는 이는 없을 것인데, 금나라의 시조가 신라의 유민이라는 점만은 어느 이야기도 부인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 예를 더 보자면, 조선 후기의 실학자인 안정복 역시 ''동사강목(東史綱目)''에서 ''김준은 삼형제인데 김준이 여진으로 망명할 때 두 형제를 두고 혼자서 갔다.''고 밝히고 있어 금나라의 시조가 신라인 김함보라고 주장한다. 이렇게 기자는 ''금나라의 시조가 신라의 왕족''이라는 주장을 여러 문헌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청나라는 우리나라를 어버이의 나라로 섬겼습니다. 예를 들어 임진왜란 때 청태조 누르하치가 선조에게 ''부모님의 나라''를 침략한 쥐 같은 왜구들을 해치우겠다는 요지의 편지를 썼었지요. 또 유명한 ''삼전도 항복'' 때는 친명배금을 외치는 조선에 와서 ''원래 우리는 고려인의 후손으로 그대들과 같은 나라였다''는 취지로 ''그대는 왜 동족을 따르지 않고 명나라를 돕는가?''라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청은 조선에 번번이 형제의 도리를 강조했습니다. 조선은 명분론에 매여 끝까지 청을 형제의 나라로 인정하지 않았지만 말이죠."
역사연구단체 한배달의 오정윤 연구원은 먼저 청나라가 조선을 부모의 나라로 섬긴 예를 들었다. 그는 누르하치가 백두산 지역에서 태어난 것을 지적하며, 당시 백두산 지역에는 만주계 조선인이 많았고 그들 중 상당수가 고려 때부터 조선시대까지 고려인 또는 조선인으로 귀화했다고 설명했다. 한 때, 누르하치도 평안도 지방관현에 벼슬을 수차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는 이야기까지 하고 나서 그는 이렇게 결론지었다.
"왜 청나라가 끝까지 조선에 호의적이었을까요? 바로 청나라가 금나라로부터 나왔고 금나라는 신라에서 출발했기 때문입니다."
역사학자 이덕일 씨도 오 연구원과 의견을 같이 했다.
"중원을 복속하고 한족을 지배했던 곳이 청나라입니다.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인조 때 조선은 몹시 혼란스러웠기 때문에, 청은 충분히 조선을 복속하고도 남았습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습니다. 청나라 사람들의 마음에 자신들의 조상에 대한 애정이 남아있었기 때문이죠."
그래서 기자는 중국의 논리를 중국 측에 그대로 되돌려 줄 때 어떤 결과가 나오는지 살펴보기로 했다. 그렇게 해보니까 예상대로(!) 중국의 공식 역사는 뒤죽박죽이 되었다. 한족(漢族) 국가인 송나라를 강남으로 몰아내고 대륙을 지배했던 금나라와 중국 역사상 최강대국인 청나라가 저절로 한국사에 포함되었기 때문이다. 거두절미하고 결론부터 말하자면 고조선이 중국사라면, 금나라와 청나라는 한국사에 속해야 한다. 그 건국자들의 뿌리가 한반도 남부라는 믿을만한 사료들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신채호와 박은식의 북방민족관
여기까지 쓰다 보니 ''재야 사학자''들의 목소리만 너무 반영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이른바 정통주류의 질책이 우려된다. 그래서 현재 한국 사학계에서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인물들이 북방 민족들을 어떻게 보았는지에 대해 잠깐 살펴 보기로 한다.
단재 신채호는 ''독사신론''에서 이렇게 썼다.
"동국, 즉 우리나라를 구성하는 민족은 선비족, 부여족, 지나족, 말갈족, 여진족, 토족의 여섯인데, 이 가운데 단군 자손인 부여족이 다른 5족을 정비하고 동국역사의 주류가 되었다."
단재의 대표작인 ''조선상고사'' 머리말도 읽어 보기로 하자.
"흉노와 몽골을 비롯한 거란. 여진족을 우리와 같은 민족으로 규정하고 그들이 우리민족에서 떨어져 나간 시기를 알아내는 것이 우리의 과제이다."
많은 한국인들이 자신이 존경하는 인물로 신채호를 꼽지만 정작 그가 무엇을 주장했는지는 잊고 살기 일쑤다.
이번엔 역사학자이며 언론인이었고 대한민국임시정부의 2대 대통령이기도 한 백암 박은식의 소설 ''몽배금태조(夢拜金太祖)''(꿈 속에서 금 태조를 만나다)를 통해 그의 북방민족관을 살펴 보기로 하자. 이 소설은 일제 식민지 시절 ''무치생(無恥生;부끄러움을 모르는 자)''이란 의미심장한 이름을 가진 서생이 만주로 떠나갔다가 꿈 속에서 금 태조 아골타를 만나 나눈 이야기를 기록한 내용이다.
"오호라. 우리 조선족과 만주족(滿洲族)은 모두 다 단군대황조의 자손으로 오랜 옛날에는 남북으로 나뉘어 서로 경쟁하기도 했고, 또 서로 통하기도 했는데 필경은 통일이 되지 못하고 분리(分離)되면서 두만(豆滿)과 압록(鴨綠)을 경계로 이루어 양쪽의 인민(人民)이 왕래도 하지 못하고 각기 살은 지가 천여년이 되었다. 이에 따라 풍속이 같지 않게 되고 언어가 통하지 않아 서로 남같이 생각하면서 다른 종족처럼 되었다. … 대개 대금국의 태조황제는 우리나라의 평주(平州) 사람 김준(金俊)의 9세손이요, 그 발상지는 지금의 함경북도 회령군이고 그 민족의 역사로 말하면 여진족은 발해족의 다른 이름으로 발해족은 마한족(馬韓族)의 이주자가 많은지라 금국(金國)의 역사로 말하면 두만강변의 한 작은 부락으로 흥기하여 단숨에 요나라를 멸하고 다시금 북송(北宋)을 취하여 중국 천지의 주권을 장악하였으니…."
이렇게 한탄하는 무치생을 금 태조 아골타가 불러 다음과 같이 말한다. 물론 꿈속에서 벌어진 일이긴 하다.
"너는 조선의 유민(遺民)이 아닌가. 조선은 짐의 부모의 나라요, 그 민족은 짐의 동족이다. 짐은 지금 천국에 있는 고로 인간 세상의 일은 직접 간섭하지 않지만 하늘에서 오르 내리는 영명(靈明)이 인간 세상을 감찰하고 있으니 현재 조선민족이 떨어진 경우와 고통스런 정황을 보는 것이 매우 측은한 바가 있으나 하늘은 스스로 싸워 강한 자를 사랑하시고 자포자기한 자를 싫어하시니, 하늘의 뜻이로구나."
민족주의와 국수주의 사이에서
기자는 개인적으로 최근 한R26;중R26;일 동북아 삼국에서 터져나오고 있는 민족주의 열풍을 바람직한 현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최근 아시아컵 축구대회 결승전에서 중국의 관객들이 보여준 국수주의적 반응과 이에 맞선 일본의 극우 정치인 이시하라 신타로의 발언("중국인은 민도가 낮아 어쩔 수 없다")은 민족주의가 얼마나 끔찍하고 좀스러우며 혐오스러울 수 있는지 보여 준다.
기자는 또한 이후 상황이 어떻게 변하더라도 (통일)한국이 ''거란, 여진은 우리 민족이므로 그들의 역사적 강역 또한 우리 것''이란 식의 ''대민족주의''로 무장하고 새로운 국가분쟁을 일으키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그러나 감당하기 어려운 중국 같은 이웃이 한국의 역사적 정체성을 위협하고 있으며 이런 현상이 현실적 대재앙으로 이어질 가능성을 고려하다 보면 ''저항적 민족주의''가 다시 필요한 시기라고 느끼기도 한다. 이런 상황 속에서 ''민족주의는 나쁜 것''이라는 주장만 고집하는 것은 ''발톱까지 무장한'' 패권주의 앞에서 무장을 해제하는 것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출처 : 진보적 시사 종합지 ''말'' 9월호
김선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