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중 패권전쟁은 없다 ②·끝] 한광수 미래동아연구소 소장 [이대희 기자(정리)]
미중 대결시대, 한국의 활로는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 최근 <미중 패권전쟁은 없다: G2 시대 한국의 생존전략>(한겨레출판 펴냄)을 펴낸 중국 전문가 한광수 전 인천대 교수는 미중 관계의 본질이 전쟁이 아닌 경쟁이라면서 한국은 '친미냐, 친중이냐'라는 이분법적 사고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강조했다. 미중은 현재 지구 최대의 이익공동체로서, 서로 대립하면서도 협력할 수밖에 없는 '협력성 경쟁'을 벌이고 있다는 것이다.
한 교수는 또한 최근 6년간 한국이 대중국 수출 1위를 지켜오는 등 한중은 '자연스런 무역 파트너(Natural Trade Partner)'이며 중국과의 경제협력은 한국경제의 필수 요소라고 지적했다. 따라서 막연한 반공의식에 기초한 중국 혐오는 위험하며 중국을 제대로 알기 위한 노력이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한광수 교수는 서울대 동양사학과와 대학원 경제학과를 거쳐 베이징대학교 경제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1979년 해외경제연구소에서 중국경제 연구를 시작했다. 1991~96년 베이징에 체류하며 중국의 경제 발전을 현지에서 관찰했고 주중 한국대사관, 무역협회, SK, 한솔제지, 현대건설의 현지 고문으로 일했다. 귀국 후 인천대 교수를 지냈으며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의 중국 고문, <KBS 스페셜> 중국 프로그램 자문 등을 맡았다. 현재는 미래동아시아연구소를 운영 중이다.
지난해 12월 13일 프레시안 회의실에서 진행된 한광수 교수와의 인터뷰를 두 차례로 나누어 연재한다. 1부는 미중 관계 외 중국경제의 발전 과정, 2부는 미중 대결 시대 한국의 진로에 관한 내용이다. 인터뷰 진행은 박인규 프레시안 이사장이 맡았다.
▲ 서울의 야경. 한국의 기적적 성장은 지난 수십년 간 이어온 미중 두 나라 사이의 줄타기를 바탕으로 이뤄졌다. 한국은 중국과 미국, 어느 나라도 버릴 수 없는 처지다. ⓒ위키백과
2부: 한국의 경제성장, 중국 경제 발전의 모델
프레시안 : 저자는 한국의 경제 성장 모델이 중국 경제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했다.
한광수 : 이를 설명하기 위해 '중국 시장 경제의 총설계자'인 덩샤오핑을 거론해야 한다. 그는 개혁개방 선언 전부터 한국 경제를 주목했다. 1978년 가을, 그는 미국의 권유로 일본을 방문했다. 신일본제철 회장 이나야마 요시히로를 만난 자리에서 중국에 포항제철(포스코)과 같은 제철소를 지어달라고 요청했다. 이나야마 회장은 "중국에는 한국의 박태준과 같은 인물이 없지 않느냐"며 불가능하다고 거절했다. 이 무렵, 덩샤오핑은 이미 한국 경제를 소상히 알고 있었다.
3년 동안 한중수교를 극비리에 준비한 사람도 덩샤오핑이었다. 2003년, 중국 국무원의 싱크탱크인 중국발전연구중심은 박태준 회장을 중국 고문으로 위촉했다. 3인의 고문이 헨리 키신저와 리콴유, 그리고 박태준이었다. 나는 박 회장의 요청으로 그의 중국고문을 맡아 그가 서거하기 전까지 그의 광화문 사무실에 8년 간 왕래했다. 학생 때, 반독재 시위로 밤낮을 보낸 나로서는 아이러니였다.
다음은 중국의 경제원로 쉐무차오의 한국 시각 얘기다. 한중수교 이듬해 늦은 봄, 나는 처음으로 자금성 옆의 중난하이를 방문할 수 있었다. 스승인 조순 교수를 모시고 간 자리였다. 우리 일행을 맞이한 사람은 중국 계획경제의 원로이자 위안화를 창안한 쉐무차오였다. 그는 시장경제에도 앞장서서 계획과 시장의 교량을 잇는 안전판 역할을 했다. 소련의 개혁 실패와 확실하게 대비되는 대목이다. 그는 덩샤오핑과는 1904년생 동갑이자 평생 혁명동지였다.
만남을 주선한 사람은 국무원 발전연구중심의 책임자인 마홍 주임이었다. 마홍의 스승인 쉐무차오 노인은 그 발전연구중심의 고문 직함을 갖고 있었다. 그 자리에서 그는 "우리도 한국처럼 발전하고 싶다"고 터놓고 얘기했다. 그 후, 마홍 주임은 한국의 재벌 체제를 벤치마킹하며 한국을 여러 차례 방문했다. 그의 한국 왕래는 오늘날 수많은 중국 '기업집단'으로 결실을 맺고 있다. 소탈하기 그지없는 마홍 주임은 한국을 좋아했다.
덩샤오핑의 후계자인 장쩌민은 한국을 어떻게 보았는가? 그는 한국을 최초로 방문한 중국 국가주석이다. 1995년 당시, 자동차 전문가인 그는 서울 거리를 메운 자동차가 대부분 한국산이라는 데 놀랐다. 한국을 완전히 미국화한 나라로 생각했던 선입견이 깨진 것이다. 장쩌민은 돌아가는 비행기 안에서 "한국을 연구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그렇게 해서 태어난 것이 '한국연구소조'다.
한중 양국은 가정 전형적인 '자연적 무역 파트너(Natural Trade Partnership)' 관계에 있다. 지리적, 문화적, 역사적, 그리고 산업구조까지 한국처럼 중국과 밀접한 나라는 과거 침략을 자행했던 일본 정도다. 미국, 일본보다 훨씬 늦게 중국과 수교했지만, 시장규모가 작으면서도 수출은 그들을 압도하는 게 한국이다. 실제, 지난 6년 연속 한국은 중국 수출 1위 국가를 유지하고 있다.
중국 국가 부주석 왕치산은 대단한 한류 팬이었다. 그는 전국인민대표대회에 참석해 한국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를 소개하며 한국을 향해 "드라마에 영혼이 실려 있는 나라"라고 찬사를 보냈다. 그들은 회의를 열고 한국 문화를 벤치마킹하려면 제도부터 고쳐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노벨문학상을 받은 작가 모옌도 참석한 회의였다. <인민일보>의 한류에 대한 십여 년에 걸친 일관된 평가는 중국의 한류에 대한 시각을 이해하는 데 참고할 만한 자료다.
우리 기업들은 중국이 개혁개방을 선언하자마자 홍콩을 통해 중국시장으로 뛰어들었다. 아직 미수교 상태에서 엄청난 양의 우리 섬유제품이 중국으로 흘러들어가 고전하던 관련 업계에 힘이 되었다. 1990년대 과잉 중복투자로 위기에 직면했던 석유화학공업도 중국 특수의 덕을 톡톡히 보았다. 지금은 어떤가? 우리는 세계 반도체 생산 1위 국가다. 그리고 중국은 반도체 수입 1위 국가다.
서방은 일찍부터 중국경제가 부상하면, 한국이 가장 큰 수혜를 입을 것으로 전망했다. 1980년대 초, 영국 국제전략문제연구소(IISS)가 앞장서서 짚어냈다. 같은 맥락에서 2007년 미국 골드만삭스는 한국이 중국시장 활용으로 '2050년에는 1인당 GDP가 9만 달러를 넘어 미국을 이은 세계 2위가 될 것'으로 전망했다.
미중관계가 한국에서 어떻게 나타나는지 알고 싶으면 서해안 일대를 가보면 된다. 인천 송도에서 평택, 당진, 군산, 새만금, 목포를 거쳐 제주도까지 미국의 군사 기지와 중국을 겨냥한 생산 및 무역 기지가 뒤엉켜 있다.
평택에는 중국을 바라보는 세계 최대의 미군기지와, 중국시장을 향하는 세계 최대의 반도체 삼성전자 공장이 있다. 목포는 한국에서 가장 먼저 중국 전문 자유무역항이 들어선 곳이다. 제주도는 중국 관광객이 가장 많이 찾는 명소인가 하면, 해군기지를 서둘러 만든 강정마을도 있다. 서해안의 이런 모습은 무엇을 말하는가? 이것이 딜레마인가, 기회인가? 전쟁인가, 경쟁인가?
▲ 한국은 미중 두 나라 각축의 전시장이다. 미군의 해외 군사 기지 중 최대 규모인 평택 기지. ⓒ연합뉴스
한중은 자연스런 무역 파트너
프레시안 : 이 같은 미중 관계가 한국에 미치는 영향도 클 수밖에 없다. 당장 지금 한국 여론은 반미-반중으로 크게 갈라져 있다. 신중국 건설부터 1972년까지는 미중 대결의 시대였다. 당시 미중은 한국전쟁에 직접 개입했고 미국은 북한 주도의 한반도 통일을, 중국은 미국 주도의 한반도 통일을 각각 막았다. 한반도 분단의 현상 유지가 그 결과물이다.
이후 미중의 화해와 대립은 한국의 진로에 영향을 미쳤다. 1979년 10.26, 1997년 외환위기, 2016년 사드 배치 등도 한국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와 관련해 저자는 1972년 미중 화해에 대한 남과 북의 대응은 남북 화해가 아닌 독재 강화라고 지적했다. 나아가 박정희 유신독재가 10.26 정변으로 이어졌다고 봤다.
한광수 : 미중 화해는 남북 화해를 위해 다시없는 절묘한 기회였다. 그러나 남과 북은 그 기회를 외면했다. 남북이 내놓은 7.4 남북공동성명은 남북 화해가 아니라, 각기 독재 권력의 영구화로 이어졌다. 분단을 명분으로 태어난 정권들의 민낯이 드러난 것이다. 1972년 가을, 그 야합의 뒷거래 과정을 포착한 미국은 분노했다(6장 참조). 그리고 70년대 내내 한미관계는 어두운 터널에 갇혀있었다. 그리고 미중 양국이 수교한 1979년 어느 가을 밤, 궁정동 안가에서 현직 대통령의 심장을 겨눈 총성이 울렸다. 당시 <뉴욕타임스>는 이렇게 적었다. "국제정세에 대한 참모들의 무지가 대통령을 죽였다." 이런 기사도 나왔다. "1979년 미국외교는 한국에서 빛나고, 이란에서는 실패했다." 이란의 호메이니 혁명을 지적한 것이다.
박정희 정부의 업적은 '반공 근대화'의 성공으로 요약된다. 그것은 1960년대 케네디 정부가 개도국들의 공산화 확산을 막기 위해 채택한 세계전략의 일환이었다. 우리의 어두운 근대화 여정은 '식민지 근대화'에서 바로 이 반공 근대화로 이어졌다. 미중 화해 당시 박 대통령은 백악관에 반공 친서를 보내 설득을 꾀하기도 했다. 학생이 스승을 가르치려 한 것이다. 반공이 권좌를 보장하는 시대는 '10월 정변'으로 끝났다. 이를 눈치 챈 신군부는 공산권 국가들과 접촉에 열을 올리는 북방정책에 팔을 걷었다. 그들에게도 반공보다는 권력이 중요했다.
이제 시대는 바뀌어 냉전시대가 가고 미중시대가 불을 뿜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반공 의식은 무의식 속에서 여전히 건재하다. 영화 <공동금지구역 JSA>의 마지막 총격 장면을 떠올려보라. 그것은 거리를 쏘다니는 무의식 반공 꼰대들에 대한 경고였다. 바로 우리 자신이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 성화 봉송 때, 중국에 대한 한국의 거부감은 여과 없이 드러났다. 세계 최대 규모의 반중 시위가 열렸다. 이것이 중국 수출 1위인 '자연적 무역 파트너' 국가의 모습이다. 앞으로도 한중교류의 길에는 큰 노력이 필요하다.
▲ 미국과 중국은 '핑퐁외교'로 대표되는 관계 정상화 후 끊임없이 대립과 협력을 반복해왔다. 한국은 두 강대국의 이 같은 정세 변화에 큰 영향을 받았다. ⓒchinadaily.com.c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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