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부는 사람이 아이가? 남편따라 죽어야 될 사람(미망인)이 아니라 전쟁에서 살아남은 사람들 아이가? 눈돌리지 말자, 자세히 들이다 보자 싶어가 영화로 찍을라칸다 카면 느무 그창한가?”
한국 최초의 여성 감독 박남옥(1923~2017)은 첫 촬영 직전 배우들을 향해 이렇게 사투리로 외친다. 서른 둘의 박남옥은 힌국전쟁 직후인 1955년 생후 6개월의 아이를 업고 촬영장을 누비며 영화 ‘미망인’(원제 과부의 눈물)을 세상에 내보였다. 이 영화는 지금도 전쟁으로 남편과 사별한 여성의 현실과 심리를 가감없이 파고든 당대 독보적인 여성영화로 회자된다.
20~24일 서울 국립극장 달오름극장에서 초연하는 ‘명색이 아프레걸’은 박남옥의 성취와 분투를 조망하면서 현재를 고찰하는 작품이다. 화려한 제작·출연진으로 지난해 말 기대를 모았으나 코로나19로 뒤늦게 무대에 오른다. 대본을 쓴 고연옥 작가는 통화에서 “박남옥은 혼란한 전쟁 직후에 미래로 가는 물꼬를 튼 인물”이라며 “보수적인 당시 인식에 영화는 3일 만에 극장에서 내려갔지만, 도전은 현재로 이어져 여성 담론의 발판이 됐다”고 말했다.
문학·영화 등에 조예가 깊었고 비평가·기자로도 일했던 박남옥은 당시 통념을 거부하고 영화 제작에 나선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기저귀를 들고 제작비를 구하러 다녔고, 스태프에게 직접 밥을 해먹였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녹음실 구하는 것에도 애를 먹었다. 그래서인지 촬영 당시 아이를 포대기에 업은 박남옥 사진에는 다부진 의지 사이로 허탈함도 묻어난다.
한국 영화사에 상징적인 이 사진이 ‘명색이 아프레걸’의 출발점이 됐다. “아이를 업은 모습에서 육아 등 전통적 역할을 짊어진 여성의 모습이 연상됐다”는 고 작가는 박남옥 자서전 등을 참고해 극본을 써내려갔다. LA에 사는 사진 속 주인공 딸 이경주씨와 연락을 수차례 주고 받으며 실재감을 더했다. 극은 ‘미망인’ 제작기와 박남옥의 삶을 극중극 형태로 구성해 몰임갑을 높였다.
무대는 최근 국립극단 신임 단장 겸 예술감독으로 취임한 김광보 연출가가 매끄럽게 풀어냈다. 고 작가와 김 연출가는 20여편을 함께 호흡한 소문난 콤비다. 국립극장 3개 전속단체(국립창극단·국립무용단·국립국악관현악단)가 10년 만에 함께하는 이번 무대에는 2019년 국립창극단 ‘변강쇠 점찍고 옹녀’ 주역 이소연과 김주리가 박남옥 역에 번갈아 오른다.
제작진이 꼽은 포인트는 바로 음악이다. 2019년 창작극 ‘극장 앞 독립군’으로 호흡을 맞췄던 차세대 작곡가 나실인이 참여했다. 나 작곡가는 “창극 등 특정 장르에 얽매이기보단 재밌는 뮤지컬인 듯한 느낌을 내고 싶었다”며 “사회적 금기를 극복한 인물을 묘사하려 음악 곳곳에 추진력과 에너지를 담았다”고 했다. 이를 위해 멜로디 전반, 국악기와 밴드 세션 곳곳에 에너지 넘치는 동일한 선율을 숨겨 놓았다.
시대상 이해가 중요한 극이기에 노랫말 전달도 공들였다. 나 작곡가는 “한국어 가사를 표현하는 건 소리꾼들이 최고라는 생각이 들었다. 좋은 결과물이 나왔다”고 전했다. 그가 16개 넘버(곡) 가운데 꼽아 소개한 곡은 중반부 클라이막스 합창곡 ‘명색이 아프레걸이라면’이다. 여성 배우들은 여기서 세상을 향해 당당히 노래한다. “명색이 아프레걸이라면 실패한 사랑 따위 오만 오천 개라도 끄떡 없어/망한 세상 있는 힘을 다해 사랑하려면 상처도 수치심도 먼지 털어내듯 날려버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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