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국진 증언 : 1932년 초겨울 安圖(안도) 유격대에 金成柱(김성주)라는 학생옷차림의 청년이 참가
◇ 李國鎭(이국진)(前(전)국가최고검찰장)의증언.
"1932년에 들어와서야 (중국)공산당이 직접 이끄는 (반일)유격대가 조직되기 시작했소. 항일홍군유격대라고 불린 이 유격대는 처음에는 인원이 많아야 10명 내외였으며 총도 몇 자루 없었소. 1932년 초겨울 (안도) 유격대에 金成柱(김성주)라는 학생옷차림의 청년이 참가했는데 그는 원래 3년제 소학교에서 글을 가르치는 선생이었소. 이 사람이 바로 金日成(김일성) 동지요. 그 당시 유격대를 지휘한 이들은 중국인 (주보중),(양정우), (이정록), (동장영) 등과 조선인인 (이홍광) (이동광) (최용건) (김책) (이광) 등이었소.
부대 명칭은 처음에 반일홍군유격대였고 33년1월 중국 공산당이「만주의 각급 당조직과 전체 당원들에게 보내는 편지」에 따라 동북인민혁명군으로,다시 36년 2월 중국공산당 공산국제주재대표단의「동북항일연군통일군대건제선언」이 발표된 뒤 해방될 때까지「동북항일연군」이라는 명칭으로 불리었소"
◇ 사투리많이써 곤혹
(김동규) ((전) 국가 부주석)의 증언.
"나는 1933년 (길림성) 왕청현에 각 지방 유격대들이 집결해 부대를 재편성했을때 金日成(김일성) 장군과 같이 배치돼 1940년까지 함께 있었소. 金(김)장군은 우리 부대의 부대장이었는데 후에는 대대장(사장)도 했어요. 우리 유격대는 항일연군 제5군에 속해 있었으며 (이정록) 장군의 지휘를 받았었지요. 우리 부대에 인원이 가장 많았던 1937년초에는 80명 정도였으나 37년 하반기부터 병력이 줄어들어 40년초에는 24명으로 줄었어요.
나는 그때 과오를 범하여 정치지도원에서 쫓겨나 밥가마를 지고 다니며 양식을 마련하는」(군수원) 노릇을 했었더랬소. 군수원이 된 후부터는 (김)장군과 기숙을 같이 했었는데, 그 분은 그때 덧니가 한두개 난것이 아니어서 입을 다물기 어려울 정도였지요. 더욱이 그 분은 평남 대동군 사람이고 나는 함북 경성군 사람이다보니 말을 서로 알아듣지 못할 때가 있었다오. 어느날 행군을 하다가 (김)장군이「머저리」하길래 왜 사람을 욕하는가 했더니 그자리에 멈춰서라고 했다는 거요.
또 한번은 그분이「동티미 생각이 난다」기에 뭐냐고 물었더니「무이를 담군거야」합디다. 그의 말인즉 겨울철에 동치미 생각이 난다는 거였지요. 1940년 초겨울에 (김)장군이 나에게 두 사람을 데리고 떠나서 어떻게 하든지 양식을 구해 오라고 합디다. 두달이나 돌아다녔지만 통강냉이(옥수수) 두 포대 밖에 구하지 못했어요. 우리가 떠나기 전에 (김)장군이 아무래도 소련에 넘어가는 수 밖에 없는것 같다고 하던 말이 생각나서 소련으로 가기로 하고 자꾸 동쪽으로 걸었지요.
천신만고끝에 소련 땅에 도착해 그곳 병영에서 이따금 북조선의 청진 나진항을 정찰하면서 몇 해를 보냈지요. 1945년 8월 9일 대포 소리와 비행기 폭격 소리가 어찌나 굉장한지 병영 안에 그대로 있을 수 없어 정거장에 나갔다가 마침 우리 부대 사람을 태운 열차가 정차해 있는 것을 보았소. 찻간에 들어서니까 대위 계급장을 달고 있는 소련군복 차림의 (김)장군이 있더군요. 다리를 약간 저는 (김정숙)이 아기를 안고 있는데 (김)장군의 아들이라더군요. (김)장군은 상위를 달고있는 (김광)에게 나를 소개해 주더군요"
-----------------
◇ 이국진(李國鎭, 1905.12.23 ~ 1980.8.10)
북한의 항일투사. 항일무장투쟁을 벌였으며, 광복 후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행정부장 겸 최고재판소장,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비서 겸 부장,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위원 등을 지냈다.
함경북도 경성군 매향리에서 출생하였다. 1928년 공청에 가입하여 지하공작원으로 활동하였다. 1931년 훈춘현 농민협회 책임자로 활동하면서 추수투쟁에 참가하였으며, 1932년 반일인민유격대에 입대하여 항일무장투쟁을 벌였다.
1962년부터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부부장, 최고검찰소 검사총장을 역임하였으며, 1966년부터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행정부장 겸 최고재판소장,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비서 겸 부장을 역임하였다. 1970년 1월부터 중앙역사박물관 관장직을 맡았다. 1961년부터 1970년까지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위원, 정치국 후보위원이었으며, 1967년부터 1972년까지 북한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을 지냈다. 묘는 애국열사릉에 있다.
이상...
0/2000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