짜릿한 흥분을 담은 어떤 물체가 서있는 구석을, 내 영혼의 먼지 낀 창문을 통해서
들여다본다. 신현에보가 나올때면 아직도 미소가 떠오를만한 여지가 남아있다는 사실을
번번이 깨닫게된다. 그 동안 어떤 세금계산서보다 복잡한 마케팅과 모델 라인을
벗겨내어 왔음에도 말이다. 대단한것은 없어도 이를 드러내고 웃을만한 이유는 얼마든지
있었다. 과거에 내놓은 각종 장비를 잔뜩실어뒀을건 뻔했다. 그리고 에보lX는 에보Vlll
마지막버전의 모든 옵션을 다시골고루 갖추고있는 인상이짙다. 거기에다 업계에서
눈길을끄는 새 장비몇가지를 보탰을뿐이다. 그러나 에보는 새로 탈바꿈할때마다 으레
거들먹거리게 마련, 건방을떨던 기세는 예전 한창때보다 약간누그러졌지만 복잡한
도로에 나설때마다 다른차와 한판 붙어보려는 오기는 여전하다. 에볼루션은 사실 극과
극을오가는 가장 대표적인 차 중의 하나다. 찬사와 비판사이에서 갈짓자 행보를 거듭하고
있는 비슷한 성격의 동지를 굳이 찾아보자면 스바루 임프레자 정도? 매일 밤마다 텅빈
거리를 쳐다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머금는 사람들에게 에볼루션은 일대 복음이다.
이 정도의 값으로 그 정도의 성능과 퍼포먼스를 마음껏 즐길수 있는 차는 현실적으로
지구 상에 그리흔치는 않으니까, 하지만 그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는 사람을 애인으로
삼고있는 여자들에게, 에볼루션은 그리 달가운 존재가아니다. 물론 옆자리에서도 운전석
못지않은 쾌감을 맛볼수 있기는 하다. 하지만 당신이 에볼루션의 운전석에 앉아있다면
과연 옆자리의 여자친구에게 다정한 말 한마디라도 건넬수있겠는가. 에보의 운전석에
앉은 이상 운전에만 몰두하기도 바쁠텐데. 미쓰비시 에보Xl는 빌스타인 서스펜션으로
중무장하고, 실내에는 여러가지 모모부품을 달았다. 겉모양도 몇가지 달라졌다. 그 중
유난히 두드러진 앞부분은 앞 범퍼. 마치 눈먼 크세논램프같은 한쌍의 큼직한 구멍이
있다. 바로 공기를 들여보내는 인터쿨러 파이프다. 그래서 에보의WRC(세계랠리선수권)
출전 버전과 더욱닮아보인다. 맞비교할수있는 에보Vlll이없어 차이를 정확히 가늠할수는
없었지만, 신형에는 새로운 가변밸브타이밍(VVT와 MIVEC)이 들어왔고,기어비도
짧아졌다. "수퍼 AYC"엑티브 요 컨트롤과 ACD(액티브 센터 디퍼렌셜)와 같은 전자장비
도 손질했다. 그러나 이렇다 할 변화를 느낄수는 없었다. 에보Xl는 굳이말해 8.5세대라고
해야 마땅하다. 에보Vlll에다 장식을 좀 덧붙인정도랄까. 우리가 시승한 버전은 320. 으레
그렇듯 에보드라이버가 시골길에서 다른차에 지지않는 이유를 새삼 깨닫게된다. 복엽
비행기 날개같은 윙과 영불해협 터널입구같은 머플러는 정말 위협적이다. 때문에
수줍거나 차분한 사람은 이차를 사지않는다. 하지만 에보Xl는 이런 저런 사정따윈
개의치 않은 채 마치 저공비행하는 버버리 제트기처럼 영국 시골길을 굉음도 요란하게
휩쓸고 다닌다. 아무래도 서스펜션과 드라이브트레인을 으식하지 않을수 없다. 가히
"그립력"이라는 귀신에게 닭 몇 마리쯤은 희생의 제물로 바쳤을 것 같다. 터보는
이전보다 점진적이다. 그래서인지 입이 쩍 벌어지려면 3천에서 3천500RPM까지는 꾹
기다려야 한다. 그러나 기다린 보람에 비하면 운전의 재미는 아주크다고까지 할 수는
없다. 326마력으로 출력을올린 4기통 2.0L 엔진의 힘으로 에보Xl는 노면을 삼킬듯
달려나간다. 힘만 넘치는 게 아니다. 뜻밖에도 예리한 구석이있다. 한계에 도달했을때
피드백이 훨씬 선명하다. 클러치와 기어조작도 약간 쉬워졌다. 앞선 세대와는 달리 너무
힘차거나 빠르지않다. 결코 비난하는말이 아니다. 붕 뜨는 오버스티어로 무릎치기를 하지
않게된, 훨씬 좋은 차다. 그러면서도 터보의 광기는 여전하다. 에보를 몰아보는 일은
정말 특이한 체험이다. 일생에 적어도 한번쯤은 해봐야 한다. 운전석에서 내릴 때면
스바루 임프레자와 비슷하게 사랑에 빠지거나 싫어하게되거나 둘 중하나일게다. 엄청난
기계와 전자 기술을 투입하여 미친듯 코너를 돌파한다. 취향에따라 바로 그때문에 에보를
사랑하게 되기도 하지만, 그 때문에 싫어하기도한다. 결론적으로 에보Xl는 그 동안
등장한 숱한 변형보다 약간 좋아졌다. 하지만 그보다 더 바라기도 어려울것 같다.
Xl FQ-320 : 엄청나게빠르고 광기를부린다. 실내는 품위가 떨어진다. 그 점에서는
지난 8세대의 에보도 별반다르지않다
29999파운드(약 4천522만원), 0->100 4.5초, 최고시속253Km, 4기통1997cc터보MIVEC,
326마력, 42.1Kg.m, 1940Kg
-------------------------------------------------------------------------------
변덕쟁이 영국놈들 ㅡ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