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의 특수부대답게 공수부대는 강력하고 확실하게 시위진압을 똑부러지게 잘하였지만, 그때까지 한번도 진압훈련을 받아 본 일이 없는 해병대 7연대는 '시민은 무찔러야 할 대상이 아니라 보호해야 할 대상임으로 결코 시민들을 상대로 무력을 사용하지 말라"는 지휘관의 명령대로 돌과 벽돌에 맞아도 묵묵히 無力행진만을 하였다. 그리하여 돌에 맞아 쓰러지는 해병대가 속출하였고, 시민에게 저항하지 않는 해병대에 부산시민들은 안타까운 마음이 들어 되려 시민들이 시위대를 말리기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총기만은 빼았기지 않기 위하여 서로의 멜빵끈을 서로의 팔에 동여매고 시민앞에 섰다고 한다.
시위가 진압된 뒤, 곧 유신정권의 내부분열로 10.26사태로 대통령이 시해당했고, 부산지역에서 공수부대는 모두 철수하고, 해병대만이 남아 도시를 수습하는 일을 맡게 되었는데, 해병대의 대민지원과 도시정비는 부산시민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와 같은 해병대의 평화로운 시위진압은 518광주민주화항쟁때 신군부의 강경진압으로 인해 뭍혀버리게 되었다고한다. 그러나 해병대가 시민앞에 양병대가 된 아름다운 시위진압은 21세기가 되어서야 비로소 신문지상을 통해 세상에 알려지게 된다.
불이익을 받기 시작
얼마 전 영면하셨습니다.
79년도 당시 진압훈련을 받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저 진압방식 이야기는 우리 선임하사들로부터 많이 들었던 내용입니다.
제가 전역하기 불과 두어달 전인 87년 4,5,6월까지 충정훈련을 정말 많이 받았습니다.
당시에도 진압훈련 지휘하던 선임하사들로부터 시민은 때리지 마라.
총은 빼앗기지 마라. 돌 던지면 맞아라 그러나 물러서지 마라. 이랬습니다.
부산, 경남지역은 해병대 출신들이 상당히 많습니다.
지원자뿐 아니라 징집 기수가 거의 1/4 정도에 달했기에 부산, 경남에서 시위 참여자 중 해병대 선배가 상당 수 있었을 것입니다.
너 몇기야 하면 다 통하던 시절이었기에 저런 진압방식도 통했으리라 생각됩니다.
그당시 휴가 나와 작업복이나 위장복 입고 서울 시내 다니다 식당 같은 곳 가면 시키지도 않은 음식들이 우리 좌석에 나오고 보내주신 선배해병들께 인사하고 또 저 역시도 대학 졸업 후 회사가 있던 마포에서 몇 몇 후배 해병들에게
고기도 사줘보고 했었습니다.
본문 내용에도 나왔지만, 광주에서의 못된 짓을 저지른 공수부대원이 나쁜것이 아니라
저들에게 명령하고 발포하게 한 자들이 정말 나쁜 자들입니다.
다시는 이 나라에서 저런 가슴아픈 일들이 반복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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