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코리아 김미숙의 느낌맛집] 이태원의 ‘라멘 81번옥’은 일본인 사장님이 면발부터 육수, 고명 등 모든 재료를 직접 만드시는데, 일본 라멘의 마니아들에게는 이미 맛있기로 정평이 난 곳입니다. 무려 4인분이나 되는 점보 라멘을 20분 안에 남김없이 비우면 공짜, 도전에 실패하면 라멘값으로 벌금 2만원을 내야 하는 재미있는 이벤트는 문을 연 2003년부터 시작돼 이 집을 더욱 유명하게 만들었다고 합니다. 이 이번트에 여성 성공자들도 심심치 않게 나왔다고 하니, 라멘 마니아라면 한번쯤 도전하고픈 생각이 들 것 같습니다.
좁은 내부의 벽에는 도전에 성공한 사람들의 사진이 명예의 전당마냥 위풍당당 빼곡히 걸려 있습니다. 빨리, 많이 먹는 내기만큼 미련한 일이 또 있을까 싶지만 이런 이벤트는 일본 현지의 라멘집에서는 쉽게 볼 수 있는 것이라고 합니다. 혼신을 다해 만든 사람에 대한 예의 표시로 남김없이 먹어 준다는 의미에서는 공짜 라면을 내주는 것이 주인에게는 큰 기쁨이 될 것입니다.
출출할 때 더 생각나고, 은근히 중독성이 강한 라멘이 유난히 생각나는 날입니다. 십여 년 전, 일본에 사는 동생을 만나러 간다는 명분 아래, 처음 일본 여행을 갔을 때가 생각납니다. 일본에 오면 꼭 먹어 봐야 하는 음식으로 처음 데려간 곳이 작은 라멘집이었는데, 그 때만 해도 봉지에 든 인스턴트 라면과 컵라면이 라면의 전부인 줄 알고 있던 저에게 일본의 라멘은 충격 그 자체였지요.
지하철 표처럼 자판기에 돈을 넣고 메뉴를 고르는 것도 신기하고, 혼자 앉아 맥주 한잔을 마시며 주문한 라멘이 나오기를 기다리는 검은 양복의 직장인들의 모습은 혼자 먹는 일이 어색하고 외로운 것이 아닌 익숙하고도 행복한 일상처럼 보였습니다. 게다가 기름에 튀긴 면을 삶는 게 아니라, 생면을 뽑아 쓴다는 것도 신기하기까지 했습니다. 그 이후에도 일본을 가면 꼭 먹고 오는 음식이 되었는데, 때때로 가이드가 없이 사진만 보고 대충 찍어 고르다 보니 라멘 초보자로서는 소화하기 어려운 느끼한 라멘을 만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마니아들은 오히려 이런 진한 육수를 더 좋아한다고 합니다.
이 곳의 라멘 종류는 크게 간장 맛, 된장 맛, 소금버터 맛, 3가지로 라멘 초보자들도 쉽게 소화할 수 있는 깔끔하고 담백한 맛이기 때문에 어느 것을 선택해도 한국인의 입맛에 거스르는 일은 없을 듯 합니다. 길 건너편 공영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바람을 맞으며 50m 정도를 걸어 오는데, 손이 차가워질수록 깊고 풍부한 라멘 국물이 더욱 그리워져 걸음이 빨라집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가게 안은 찜통이라도 된 듯 훈훈한 열기로 가득 차 있고, 돼지 고기 삶는 냄새가 구수하게 퍼집니다.
마침 차슈(돼지고기를 푹 삶아 쪄낸 것)를 삶는 중이라고 합니다. 차슈는 일본 라멘을 상징하는 뗄래야 뗄 수 없는 마스코트 같은 것이지요! 이 집에서 가장 인기 있는 간장으로 맛을 낸 챠슈멘을 주문했습니다. 이 집의 차슈는 입 안에서 사르르 녹는 맛이 일품인데, 차슈를 먹을 때엔 살살 달래듯이 집어 조심스레 입까지 가져가야 합니다. 막 다루면 젓가락에 닿자 마자 부서져 버린답니다. 돼지 고기가 어떻게 이렇게 부드럽게 변할 수 있는지 한 점 한 점 그 맛을 음미하면서 먹어 볼까요? 아~ 입 안에서 눈처럼 사르르 녹아 내리는데요. 라멘의 국물 맛을 더욱 감칠맛 나게 해주는 것 같습니다. 면발은 거의 익혀서 나오기 때문에, 탱글탱글한 느낌보다는 면발이 순하고 부드럽게 넘어가는 느낌이라고 할까요?
네기 미소라멘은 파를 채썰어 버무린 고명이 올라간 것으로, 얼큰한 걸 좋아하는 한국인의 입맛에 안성맞춤입니다. 파채의 매운 맛은 보통맛과 매운맛으로 주문 할 수 있는데, 매운맛을 좋아하는 저는 역시 매운맛을 선택했습니다. 이 또한 한번 먹으면 중독성이 강한 맛이지요. 네기 라멘의 고명으로 올려진 옥수수는 은근히 달짝지근한 맛을 내며 고소함을 더해 줍니다. 네기(파)의 매콤한 맛과 어울릴 것 같지 않으면서도 묘하게 잘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
새로운 음식을 시도 할 때 가장 중요한 원칙 한가지는 제대로 된 것을 먹어 보는 것이죠. 저는 일본에서 오래 살았던 동생 덕분에 입맛에 맞는 라멘을 맛보고, 이렇게 맛있고 특별한 것이구나 감탄을 하면서 라멘의 새로운 세계에 빠져 들게 되었습니다.
먹는 사람이 감동하면 그것으로 음식의 사명을 다 한다고 생각되는데 이 곳의 라멘은 한국인의 입맛을 생각해 깔끔하고, 담백한 맛을 추구하는 듯 합니다. 인스턴트 라면은 싼값에 배를 채울 수 있는 가장 서민적인 음식이어서 한 그릇에 만원을 호가하는 일본 라멘에 약간의 반감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일본인에게 라멘은 혼신의 힘을 다해 창조해 내는 예술 작품과도 같은 것이라는 것을 알고 나니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일본인들에게도 라멘은 가장 서민적인 음식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한끼 식사로 치기엔 비싼 감이 없지 않지요! 그래도 고명 하나 하나의 맛을 깊게 음미하며 라멘을 맛보는 것이 즐거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만든 사람의 정성을 생각해 국물까지 남김없이 비우고는 아쉽게 젓가락을 내려 놓습니다.
라멘 알고 먹기
지방에 따라 각기 다른 특성이 있는데, 추운 북쪽 지방은 일본 된장인 미소라멘, 동경을 중심으로 한 중부 지방은 간장으로 맛을 내는 소유 라멘, 남부 지방인 큐슈 지방은 돼지뼈 등을 우려낸 돈코츠 라멘이 발달했습니다. 일본 라멘의 스프는 가게 주인의 자존심과도 같은 거랍니다. 열과 성의를 다해 만드는 만큼 국물까지 다 먹는 것, 조용히 먹기 보다는 후루룩 후루룩 소리를 내면서 맛잇게 먹는 것이 예의라고 합니다.
라멘의 토핑
라멘은 면과 스프를 즐기는 것이지만, 스프와 면을 한층 더 맛있게 하는 여러 가지 토핑이 있는데, 일본 라멘에 빠져서는 절대 안 되는 차슈(돼지고기를 푹 삶아 쪄낸 것), 멘마(죽순을 간장에 쪄낸 것), 계란, 김 등이 있습니다.
여기는요!
[라멘 81번옥 ]- 용산구 한남동 737-24
02-792-2233
GUIDE TIP
면과, 모든 토핑은 추가로 주문 할 수 있습니다. 점심과 저녁 시간 사이에 쉬는 시간이 있으며, 라멘 생각에 무작정 갔다가는 월요일 쉬는 날에 찾아가 헛걸음을 할 수 있으니, 조심하세요!(저의 경험담!-매주 월요일은 문을 닫는답니다.) 라멘을 가장 맛있게 먹는 방법은 빨리 먹는 것! 모든 음식은 천천히 음미하며 꼭꼭 씹어먹어야 건강에 좋다지만, 라멘 만큼은 후루룩 뚝딱 비우는 것이 최고의 맛을 즐기는 유일한 방법이니까요!
김미숙 객원기자(94년 미스코리아 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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