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6년, 서울은 깡패들의 천국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종로의 아오마스, 동대문의 이정재, 명동의 이화룡이 서울을 삼분하여 거리의 잇권을 놓고 대립하여 싸우느라 늘 서울의 밤은 소란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시 서울 유흥가거리에는 껄렁이는 깡패들이 많았고, 시민들은 그들을 보면 고개를 숙이고 피해다닐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용산에 사령부를 두고 있던 해병대가 하루 날을 잡아 이 깡패들을 소탕하고 참교육한 사건이 있었다.
이러한 해병대의 깡패소탕작전 및 참교육은 깡패들이 해병대의 인내심을 폭발시킨데서 시작되었다.
1956년, 6월, 부산에 주둔하던 해병대사령부는 수도 서울의 용산에 신청사를 마련하고 상경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사령부에 근무하는 해병들이 서울시내로 업무 또는 외출,외박을 자주 나가게 되었다. 그러다보니 유흥가에서 깡패들과 조우할 일이 많았는데, 당시 가장 무서운 부대로 정평나있던 해병대원들이 깡패들 앞에서 기가 죽을 리가 만무했다. 그래서 자주 깡패들과 거리에서 육탄전을 벌이곤 했는데, 해병들에게 맞은 깡패들도 많지만, 반대로 유흥가가 깡패들의 홈타운인 이상, 깡패들의 습격에 짖밟히고 맞고 돌아오는 해병들도 종종 있었다. 물론 해병들은 부대로 복귀한 뒤, “내가 이정도로 얼굴이 상했으면, 그넘들은 어떨 것 같으냐”며 호기롭게 말했지만, 지휘관들이 볼 때는 자신의 부하가 되먹지 못??? 깡패들에게 맞은 것이 못마땅할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언제 한번 제대로 깡패들을 혼을 내줘야겠다라고 벼르게 되었다. 그리고 이후 깡패들을 향한 분노가 폭발하여 해병들이 유흥가로 처들어가 깡패들을 타작하기까지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해병들의 인내심의 끈을 깡패들이 끊어버린 사건은 이러했다.
당시 사령부에는 유명한 운동선수 출신 해병 두명이 복무하고 있었다. 그런 대단한 운동선수가 해병대원이란것은 부대 홍보에 있어 큰 유익이 될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해병대는 그들을 참 귀하게 여겼는데, 이 두 해병이 명동의 클럽에 가서 술을 마시다가 깡패들과 시비가 붙은 것이다, 처음에는 커다란 체격의 운동선수 출신 해병들에게 깡패들이 두들겨 맞았지만,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깡패들은 인근에 있는 동료깡패들을 잔뜩 데려와 숫자로 밀어붙여 해병들을 처참하게 짓밟아 버렸다. 해병들의 부상은 상당히 심각하여 오랜 기간 병원에 입원해야 할 정도였다.
이 소식을 들은 해병대 사령부의 장교들은 크게 노하였고, 참모중 한명인 정세웅소령은 오후과업을 접고 경비중대 대원들과 전쟁터에서 날고 기던 참전 하사관들, 총 50명을 집합시켜 각목을 나눠주고 트럭에 나눠태운 뒤, 그대로 명동 중심가로 달려가, 하차하여, 명동 곳곳의 거리와 클럽, 술집들을 샅샅이 뒤져서 조금이라도 껄렁하게 보이고, 누가 봐도 저건 깡패다 싶은 사람들은 모두 몽둥이 세례후 트럭에 태워 사령부로 연행하였다.
그리고 잡혀온 깡패들을 원산폭격시킨 뒤, 몇 대식 빠따를 때린 다음,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로 각종 해병대식 기합을 주어 깡패들의 눈에서 독기가 풀리고, 순한 양이 되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두 번 다시 시내에서 만나는 해병들은 물론이거니와 나라를 위해 수고하는 군인들을 절대 건들지 않을 것을 확약 받고 다시 돌려보냈다.
그렇게 깡패들이 사령부에서 곤욕을 치르고 돌아가고 몇일 뒤, 사령부로 뜻밖의 손님이 찾아왔다. 그는 사령부에서 잔뜩 혼이나고 돌아간 깡패들의 두목으로 당시 내놓으라하는 조폭의 보스중 하나인 명동파 두목, 명동신사라 불리던 그 유명한 이화룡이었다.
이화룡은 깡패소탕을 지휘한 정세웅소령을 찾아와 정중히 인사한뒤, 부하들이 해병들에게 함부로 대했던 것을 진심으로 사과했다고 한다.
그 뒤로, 명동에서 깡패들이 해병들에게 시비거는 일이 사라졌고, 명동뿐 아니라 종로나 동대문등 다른 서울의 유흥가에서도 깡패들이 해병을 건들지 않게 되었는데, 명동파가 해병대에게 크게 당한 일이 서울의 다른 폭력조직들에 소문이 났기 때문이다.
이후, 해병대와 명동파는 돈독한 관계를 가지게 되었고, 형님,동생 하면서 지내는 해병과 건달들이 많아졌다고 한다. 명동깡패들 중에는 해병대의 패기 있는 모습에 반하여, 건달생활을 청산하고 해병대에 입대하는 건달들도 꽤 있었다고 합니다. 이들중 입대자격에 미달하는 사람들이 있자 ..깡패소탕전 때, 명동건달들을 타작했던 해병간부들이 물심양면 여러 가지로 배려해주어 그들이 입대할 수있도록 도와주었다고 한다.
이러한 해병대의 깡패소탕전은 명동뿐 아니라, 경찰들과 합동작전으로 청량리 일대에서도 한차례 있었다고 한다. 1950년대 당시의 해병대는 전쟁터에서는 귀신잡는 해병대라 불릴만큼 역전의 용사였고, 전쟁이 끝난 뒤에는 서울 시내 거리마저도 평화롭게 만드는 진정한 전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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