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일본인은 솔직해질 수 없다
일본인들은 15 세기 이도다완 전쟁에서 보듯 , 이러한 한국적 무심함을 높이 취해서 과도하게 발전시킨 나머지 , 그들의 도자기는 자의식이 담긴 작의적인 것이 됐다 . 일본인들은 가마에서 구워낸 화병의 한 귀를 일부러 구부리거나 깨버림으로써 한국 도자기가 갖는 것 같은 ‘무심함 ’의 미를 주려고 한다 .
일본에서는 솔직함이 통용되지 않는다는 말을 여러 번 들었다 . 자기 감정을 밖으로 표현하는 법을 배우는 일본인들은 어떤 상황이라도 거기에 맞는 표정을 지어 보일 수 있다 . 그들이 진짜로 느끼는 감정은 속에서 억제되고 대신 ‘작의적 얼굴 ’로 외부에 알려지는 것이다 . 일본인에게 인생은 이미 오래 전에 의도된 대로 따라가야 하는 것이니 누구든 자신을 거기 맞춰 살아야지 예상에 없는 짓으로 혼란스럽게 해서는 안 된다 . 이러한 작의성 (Contrivance) 또는 호벤 , 솔직함이 없고 자연스러움도 없는 이 기질은 일본인의 성격에 배어난다 . 그러니 일본 교육부가 나서서 (교과서 왜곡을 두고 ) 사죄한다고 해서 상황이 달라지리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 어떻게 해야 일본인들이 솔직해질까 . 1300 여 년에 이르는 한일관계 역사를 왜곡하고 있는 일본 . 어떻게 해야 그들이 역사왜곡을 바로잡고 솔직해질 것인가 .
교과서 왜곡과 전쟁 징후
나는 일본이 절대 그럴 리 없다 확신한다 . 미국 컬럼비아대학의 사이러스 피크 교수는 원자폭탄의 끔찍한 경험이 겨우 일본헌법의 전쟁금지 조항을 이끌어냈을 뿐이라고 썼다 . 이후 신세대가 성장했고 국방비를 지출하지 않는 데 힘입어 일본의 1 인당 소득수준은 엄청난 것이 되었다 . 1982 년 세계인은 일본에서 군국주의 파워가 서서히 고개 드는 것을 실감할 수 있게 됐다 .
일본의 사회규범은 엄격하기 짝이 없고 거기서 헤어나올 방법이 없다 . 자민당이 계속 집권한다면 신군국주의를 지속적으로 강화할 것이 뻔하다 . 그것도 점점 더 대담하게 말이다 .
아무도 고등학교 교과서 쓰인 몇 줄 글을 두고 전쟁이 일어나길 바라지는 않는다 . 그러나 이것은 앞으로 전쟁으로 치달을 수 있는 징후를 보여주는 것이다 . 하지만 본질적으로 솔직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무엇을 기대할 수 있을까 . 왜곡된 역사교과서를 배우는 청소년들은 곧 군인 적령기가 된다 . 노골적으로 군을 미화하는 정책이 지속된다면 일본 당국은 자기들이 저지른 침략과 전쟁의 흔적을 제거하는 데 나설 것이다 . 시간이 흘러 진상을 아는 사람들이 모두 사망하고 나면 그 다음엔 어떻게 될 것인가 .
[#3] 조지 샘슨에게 배운 일본사
영국 사학자들은 바보가 아니다 . 영국에서 일본사의 권위자로 알려진 조지 샘슨 경은 컬럼비아대학 재학시절 스승이기도 했다 . 그는 내 박사학위 논문을 심사한 9 명의 위원 중 한 사람이고 , 일본 정부가 주는 훈장을 받았다 . 오랜 기간 일본에서 살아온 조지 샘슨은 저서 ‘1334 년까지의 일본사 ’에 ‘이즈모 후도키 (出雲 風土記 )에 전해지는 일본 고대사의 흥미로운 전설 ’에 대해 썼다 . ‘
이즈모 후도키 ’는 713 년에 나온 책이다 . 당시 겐메이 (元明 ) 여왕은 각 현에 그 지방의 역사와 지리 , 희귀한 일 등을 기록해놓도록 지시했다 . 그렇게 해서 3 군데 기록이 오늘날까지 전하는데 , 그중 하나가 신라에서 온 한국인들이 정착해 살던 이즈모 (出雲 )에 관한 것이다. 즉 신라 사람들이 대규모 이즈모로 이주해 갔음을 뜻하는 것이다 .석기시대 일본에는 인구가 아주 적었으므로 , 많은 한국인이 오늘날 미국 이민을 떠나듯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 당시 일본으로 가 정착한 것은 아주 자연스런 현상이었다 .
천조대신 아마데라스의 오빠이며 일본의 역사서에 ‘맹렬한 남성 ’으로 기록된 스사노오노는 일본으로 이주한 한국인 가운데서도 아주 정력적인 남자였던 듯하다 . ‘그는 김해에서 바다 건너로 금과 은을 보냈다 ’고 한다 . 또 신라지역인들의 무속적 지도자로 흰말을 탔다고 전해진다 . 히로히토 천황도 1930 년대 거동할 때 흰말을 탔다 . 1973 ∼74 년 천마총 고분에서 자작나무 말다래에 무속적 통치자의 흰말을 그린 5 세기경 신라의 천마도가 발굴됐다 . 영리한 일본인들은 한국에서 들어온 무속사상에 흰말 , 곡옥 , 왕관과 기타 등을 연계시켰다 . 1920~30 년 군국세력이 팽창할 때 통치자 숭배사상이 되살아났다 .
내가 샘슨 경에게서 배운 일본사에는 ‘일본의 성스러운 통치자 ’로 불리던 일왕 중에도 15 세기에는 너무 가난해서 그저 글씨를 써서 팔아 연명하던 사람도 있다 . 어떤 왕은 장례 치를 돈이 없어 몇 달 동안이나 매장되지 못했다 . 군권을 장악한 권력자나 장군들이 왕위를 마음대로 세우고 찬탈했다 . 14 세기에는 차남이 장남계열을 밀어내고 왕권을 차지했다 . 적통 장자의 후손은 지금 (1982 년 현재 ) 오사카에서 가난하게 살고 있고 , 차남으로 왕좌에 오른 사람의 후손은 지금 도쿄의 왕궁에서 지낸다 .
판소리를 말살하려던 이유
내가 컬럼비아대학에서 배운 일본사 중 어떤 부분은 지금 일본 정부의 인가를 받아 출판된 역사교과서에서는 볼 수 없는 내용들이다 . 샘슨 경이 예술문화사 분야의 스승으로 여기던 사람이 바로 도호쿠 (東北 )대학의 후쿠이 리키치로 (深井陸次郞 ) 교수다 . 후쿠이 교수는 “15 세기 아시카가 막부시대의 뛰어난 수묵화가 대부분이 한국인이다 . 그들은 조선시대의 불교 탄압으로 절이 핍박받자 더 이상 절에 의탁할 수 없게 된 나머지 일본으로 건너온 한국의 불교미술가들 ”이라는 대담한 주장을 편 학자다 .
나는 이 영국인 일본사학자로부터 일본 역사의 매우 민감한 부분인 초기 고대사와 1910 년 이후 전쟁을 포함한 현대사 과정을 배웠다 . 현대사 부분은 아직도 그때를 증언할 사람들이 살아 있다 . 그런데 초기 고대사는 1930 년대 일본이 세계의 정복자를 꿈꾸며 군국주의를 팽창시킨 기저로 활용된 만큼 중요한 부분이다 . 따라서 일본정부는 2 차 세계대전사를 다시 쓰는 순간에도 자국의 건국 기초가 된 고대사에서 눈을 뗄 수가 없는 것이다 .
712 년에 씌어진 ‘고사기 ’는 과거 문자기록이 불가능하던 때 역사 속 왕의 치적과 영웅담을 자자손손 내려가며 노래처럼 외워 부르던 내용을 편집한 것이다 . 한국의 판소리와 같은 유형이다 . 일본이 과거 왜 한국의 판소리를 말살하려 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 문자로 기록된 최초의 역사는 620 년 성덕태자와 그의 삼촌이자 권력가인 소가 우마코 (蘇我馬子 )의 합작으로 편찬됐다 . 소가 우마코는 한국인 후손으로 일본 내 최고 군사권력자가 된 사람이다 . 그러나 645 년 소가 가문이 권력을 잃게 되자 그가 쓴 역사서들도 불길 속에 던져졌다 . 전하는 이야기로는 그 책의 일부가 불길 속에서 건져졌다고 한다 .
두 번째 역사 편찬은 덴무 (天武 ) 일왕 때 시도됐다 . 당시 오랜 역사를 모두 기억하는 신하가 한 사람 있었다 . 그가 기억하는 옛이야기를 모두 글자로 기록하라는 임무가 학자에게 주어졌다 . 그러나 천황이 바로 죽고 다음 대에 넘어가도록 아무 진척이 없었다 . 결국 712 년에 와서야 구전 역사를 고사기로 편찬했고 이것이 실존하는 최고 (最古 )의 일본 역사서가 됐다 .
이 책은 한눈에도 엉성해 보인다 . 그럼에도 이 책에서 한국인들의 놀라운 위력을 입증하는 흔적을 찾을 수 있다 . 한국이 일본에 끼친 영향은 너무나도 압도적인 것이기에 이를 완전히 감춰버리기는 불가능했던 것이다 . 신하 한 사람이 기억해서 풀어놓은 옛이야기는 아마 순수 일본어였을 것이다 . 그로부터 29 년의 작업 결과 나온 고사기는 순수 한문으로 씌어진 것이었다 . 그 작업이 얼마나 어려웠을지 능히 짐작이 간다 . 또 얼마나 부정확한 것인지도 짐작할 수 있다.
계속
역사와 뿌리를 알아야 의식이 바뀝니다.
잘못된 역사의식(식민사관)을 뿌리 뽑아야 합니다.
식민사관 퇴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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