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가 한반도에서 약탈해간 자원은 천문학적 액수.
특히 금과 철광, 석탄 등을 대거 약탈해감.
"일제는 금으로부터 시작하여 우리 나라의 풍부한 지하자원을 닥치는대로 약탈"
"일제가 1910년~1918년에 조선에서 약탈하여 일본에 가져간 금만 하여도 천문학적액수"
"일제의 1936년의 철광 약탈은 1933년에 비해 10만t 증가할 정도로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1943년과 1944년의 단 2년 동안에만도 일제는 우리 나라에서 559만 6000여t의 철광석을 약탈"
"1937년~1944년기간에만도 유연탄은 1833만여t, 무연탄은 1000만t이상 약탈"
"이외에도 일제는 각종 지하자원을 약탈,동, 아연, 중석, 니켈, 망간도 대대적으로 약탈, 마그네사이트를 약탈"
아래에는 일본의 한국문화재 약탈에 대한 타임지 2002년 2월자 글임.
일본인들은 수천점의 문화재급 유물들을 한국으로 부터 약탈했다.
그러나 한국으로의 송환 문제는 쟁점이 되고 있으며 복잡하다.
By DONALD MACINTYRE 서울
작년 7월 비가오는 여름아침 동이트기전 3대의 대형트럭이 몇몇 특별승객을 태우고 서울 남부에 있는 야외조각박물관의 문으로 들어섰다. 트럭에는 70개의 나무상자가 실려왔고 그안에는 펠트로 조심스럽게 감싸져 있었다. 65개의 한국의 문인상과 한개의 무인상 4개의 어린이들을 조각한 조상들이 배치되었다. 수백년전에 화강암 덩어리들을 고상하고 일정한 양식으로 조각한 조상(彫像)들은 한국의 왕족들의 무덤을 지키기 위해 서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조상들은 반세기동안 한국에서는 볼 수 없었던 것이다. 그것들 대부분은 1910년으로 부터 1945년 까지 일본의 한반도 점령기동안 사라졌던 것이다.
동이트고 하늘이 맑게 개인 그날 아침에 인부들은 경건한 마음으로 첫번째 상자를 열어 보았다.크레인으로 첫번째 조상을 끌어 올리기 전에, 박물관장 브라이언 장과 박물관 감독은 짚으로 만든 멍석을 깔아놓고 큰 절을 두번 올렸다. 장씨는 감격에 목이겨워 " 이것은 강제로 일본으로 끌려갔던 선조들이 다시 돌아온 기쁨과 같다."고 말했다. "우리는 마침내 이것들을 되찾아왔다." 석재 조각상들의 귀환이 축하의 이유였다. 이 조각상들을 소유하고 있던 일본의 마모루 쿠사카라는 사업가는 이것은 한국이 소유해야만 마땅하다는 결정을 했다.
한국인들은 그들의 문화유산이 해외에 굉장히 많이 있다는 것을 예리하게 느끼고 있다. 19세기 말 이래로 일본이 2차대전에 패배할 때까지 일본 식민지 관료들과 개인 수집가들은 한반도 전역에서 적어도100,000점 정도의 유물과 문화재를 대량으로 수집했다.일본의 약탈자들과 일본정부의 후원을 받는 고고학자들은 한국의 왕과 왕비등의 무덤을 파헤쳐 정교하게 장식된 금제 장식품,옥으로 만든 장식품, 아름다운 도자기류등을 약탈하였다.
그들은 불교사원으로 부터 석재 조각품, 석탑, 값을 먹일 수도 없는 사리함등을 강제로 실어갔으며 각종서고(규장각등)로부터 수만권의 고대 문서들을 옮겨갔다.개성(현재 북한 남부지역)인근의 고려시대의 귀족들의 무덤에서만 발견되는 최상품의 청자와 같은 최고의 약탈품은 일왕에게 진상되었다. 고대의 항아리와 창등은 일본의 가장 주요한 대학의 저장고와 수집고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일본인들이 물러가자 마자 젊은 한국 국립박물관 직원이였던 황수영씨(현재 83세)는 개성으로 갔고 피해상황을 조사했다. 그는 분노에 찬 목소리로 "나는 텅텅비고 파괴된 무덤들을 보았습니다." 라고 말했다. "사람들은 내게와서 말하길 '왜놈들은 나에게 총을 드리대고 협박해서 내 조상들의 무덤을 파게했습니다.' "
제 2차세계대전이 끝난후 50년이상, 서구의 정부와 박물관들은 나찌의 예술품약탈로 인한 유품들을 가지고 격렬하게 다투었다.그들은 정당한 소유자들에게 많은 보물들을 되돌려 주는 작업을 하고 있다.하지만 아시아에서 일본의 약탈에 대한 이야기,특히 한국에 있어서는 가장 나쁘고 잘못 처리된 경우이다. 비교해보자면, 조사조차 되어있지 않고 그냥 남아있다. 일본이 대량으로 약탈한 보물들에는 숨겨진 음모섞인 이야기들이 존재하고 있는데, 도난당한 예술품과 유물들의 문제를 심각하게 따져본 적이 한번도 없다는 것이다. " 다 드러내놓고 따질 분야입니다"라고 존 도우어 M.I.T대학 사학과 교수( Embracing Defeat:Japan in the Wake of World War 2의 저자)는 말했다. "이것은 사실 묻혀버린 이야기입니다."
묻혀있던 하나의 이유는 즉 전후 일본의 문화재 반환 논의는 정치적 관심사들에 급속히 자리를 빼았게 버렸기 때문이다.일본의 문화재 반환의 핵심적인 반대자는 동경주재 미 점령정부 수반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이였다. 타임지가 미국립문서보관소에서 발견한 신뢰할 수 있는 1948년 5월의 무선통신 발췌본에 따르면, 맥아더는 육군에 "단견이지만, 나는 군사행동과 점령의 결과로서 잃어버리거나 파괴된 문화재의 소유권을 원상회복시키는 일에 아주 적극적으로 반대합니다."라고 말했다.문화재 반환을 요구하는 것에 대해 맥아더의 반대는 법적,인종적,도덕적으로 아무런 정당성을 갖지 못하는 것이였다.하지만 이것은 즉각적으로 미국의 정치적인 목표와 점증하는 냉전의 위협과 관련성을 갖는 것이였다.맥아더는 " 우리에 대하여 일본인들을 격분케 하고, 일본을 자발적으로 이데올로기적인 압력으로 향하게 하고, 파괴적인 행동으로 가도록 조장하는 것."과 같은 과정으로 설명하고 있다.
19세기 말까지 러시아,중국,일본은 한반도를 통제하기 위해 모두들 경쟁을 벌였다. 한반도를 전쟁터로 하여 두나라와 전쟁을 벌여 승리한 후 일본은 한국을 1905년 보호령으로 만들고 1910년 병탄했다.군부는 처음부터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고, 약탈지와 같이 한국을 다루었다.
거대기업(자이배츄) 또는 복합기업이 1930년 후반 중국과의 전쟁을 가속화하기 위해 식민한국을 산업기지로 바꾸어 놓는 핵심적 역할을 수행했다. 한편으로 한국의 몇몇인사는 저항 단체를 만들었고, 일본은 압도적인 힘의 우위로 대부분의 저항을 진압하였다.몇몇 엘리트(매국노들-역주)들은 적극적으로 신지배자들과 협동하였다.하지만 대다수의 한국인들은 2등시민의 위치에 있었고 일본의 약탈을 공식적으로나 비공식적으로나 막을 힘이 없었다.
동경에 있는 평화롭고 숲이 우거져 있는 야스쿠니신사를 한가롭게 산보하면, 한국인들의 분노의 깊이를 이해할 수 있다. 이 신사는 영예롭게 죽어간 일본군인들을 위한 곳이다. 더우기 수 많은 전쟁범죄자들의 위패도 함께 있는 곳으로, 일본군국주의의 가장 악명높은 상징인 곳이다.한국인들은 일본의 준이치로 고이즈미총리가 지난 8월 그 신사를 참배했을 때 격분했었다. 하지만 이곳은 또 다른 이유때문에 한국인들에게 생생한 상처를 주고 있다. 신사안에는 뒷쪽으로 육중한 철문이 잠겨져있으며, 외진구석에 있어 잘 보이지 않는 곳에 높이가 2미터 정도되는 단순한 비석모양을 한 기념비가 있다. 1709년에 새겨진 이 기념비는 16세기후반의 일본군대의 침입(임진왜란 당시 일본이 훔쳐간 북관대첩비를 말함, 현재 일본과 남한 그리고 북한이 서로 반환에 대하여 협상중-역주)을 격퇴한 한국의 승전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다. 어째서 그 기념비가 현재의 북한지역에서 이 논란이 되는 신사로 떠나 왔을까? 러.일전쟁후 한 육군소장이 일본이 승리한 증거로서 일왕에게 이 기념물을 보낸 것이다.
"이 기념물이 모든데 다놔두고, 야스쿠니신사에 있다는 것은 충격적인 일입니다."라고 동경대 한국사교수 마사히로 사토미씨는 말했다. "한국인들이 매우 격분하고 있는 것에 이해가 갑니다."
잃어버린 문화재의 소유권문제는 두한국과 일본사이의 고통으로 얼룩진 (역사)관계속에서 더욱 감정이 격해진 앙금의 하나로 남아있다.북한은 일본과의 (국교)관계 정상화회담에서 응하던 응하지 않던간에 훔쳐간 문화재들의 반환을 회담의 최우선 안건으로 정해 놓고 있다. 상대적으로 남한과 일본정부사이의 우호적 정치관계는 수십년이 지났지만 상호이해의 부족으로 비틀거리고 있다.
일본인들은 프랑스와 영국과 같은 식민지 강국들도 여기저기의 식민지들로부터 수집한 약탈품으로 그들의 박물관을 채우고 있다고 지적한다. 일본의 관료들과 학자들은 한국이 오랬동안 잊고 있었던 고대한국의 영광들을 보존하는 데 도움을 주거나 재발견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와세대 대학의 한국문학과 교수인 이성시씨는 " 한국인들은 도둑질한 일본을 비난하고 있지만 일본인들은 그들이 좋은 어떤일을 했다고 생각한다. 일본인들은 감사를 받아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한편으로 한국인들은 2차대전시 일본과 동맹을 맺은 독일의 나찌와 비교하면서 일본을 무자비한 전시점령군으로 보고 있다. 한국인들은 1930년대와 40년대의 일본의 가혹한 정책들을 지적하고 있다.
즉 수천명의 소녀들과 여성을 납치해서 위안부로 만들었으며, 400여만명의 한국인을 광산과 공장에서 노예처럼 강제 노동을 시킨 일. 그리고 한국의 전통문화를 잔혹하게 해체시킨 일 즉 강제로 일본식으로 이름을 사용하게 하거나 일본어를 사용하게 한 일을 들고 있다. "일본이 한국의 문화를 말살하려고 시도했던 것은 매우 명백하다. 한국인으로서, 우리가 그런짓을 막을 수가 없었다는 것에 나는 부끄러움을 느낌니다"라고 식민지시대를 연구한 이구열씨는 말했다.
오늘날 경도국립박물관안에는 한 휴게소가 존재하고 있는데, 휴게소의 지붕은 2미터높이의 석재 기둥이 떠받치고 있다.휴게소의 벤치위에는 방문객들이 휴식을 취하거나 잡답을 하고 있다. 한국인들은 햇불형태의 기둥에 경악을 한다.즉 그것들은 왕의 권위를 상징하는 것으로 예전에 왕릉앞에 놓여져 있던 것이다. 1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도프 레스토랑의 입구에 들어오는 길가에는 화강암으로 된 한국의 문인상들이 열을 지어 서있다. 2년전 박물관장 장씨가 그 간이식당을 방문했을 때 그 조각상들마다 앞에 일장기가 꽃혀있는 것을 발견했다.그는 부아가 치밀었다. "내가 그 자들을 죽이고 싶었던게 사실입니다."라고 장씨는 말했다."무엇보다도 먼저 도둑질하는 것은 나쁜일입니다.헌데 도둑질한 것을 가지고 그릇되게 사용하는 것에 분노가 치밀어 오름니다."(그 레스토랑은 더 이상 일장기를 꽂지 않고 있다.)
1900년대 초반 일본은 두가지 목적으로 한국에의 발굴을 후원하기 시작했다.즉 가치있는 유물들을 일본으로 가져오고, 이들 유물들을 이용해서 실질적인 병탄을 정당화하기 위해서였다. 와세대 대학의 이성시씨는 "일본과 한국은 뿌리가 같았는데 한국이 일본과 나눠지게 됨으로서 발전하지 못했다는 것을 일본이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동경대학의 사토미씨는 "일본은 이 유물들을 이용하여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했다."고 말한다. 1905년 일본은 한국을 보호령으로 선언해 버렸고,일본의 보물사냥꾼 떼거지들은 도굴과 약탈품들을 팔아서 먹고 살았다. 1930년대 평양박물관의 일본인 감독관 아키오 고이지미씨와의 당시의 상황에 대한 인터뷰에 따르면, 그들은 금광을 캐듯이 도굴을 자행하여 벼락부자가 되기를 꿈꾸었다고 한다. 보물사냥꾼들은 정초때 마다 무덤에서 수탉이 운다는 황금병아리에 대한 동화에 자극을 받았다고 한다.
고이치 아리미츄는 1907년 태생으로 일본점령기동안 일어났던 일을 목격한 몇몇 살아있는 사람중에 한명이다. 존경받는 고고학자로 아리미츄는 1931년 졸업후 직업을 수행하기 위해 한국으로 갔다.
"우리는 한반도의 역사를 알고 싶었습니다. 읽을 자료는 없었고,실질적인 문화유적지들을 발굴하는 것으로 부터 알 수 있었을 뿐이였습니다."아리미츄는 그가 일하고 있는 경도에 있는 한 작은 발물관에서 있은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일본은 한국의 문화유산에 대한 목록화 사업을 위해 학자들을 보냈고, 한국사에 있어 처음으로 다음과 같은 성과를 거두었다고 했다. 식민지 관료들은 기와와 사원건축물로 부터 자기와 왕의 보석류까지 총 15권에 이르는 책을 만들었다.이 책들은 아직도 한국문화의 이해를 위한 카탈로그로서 많이 사용되고 있다.아리미츄는 약탈은 만연했지만 자기와 같은 개인연구자들은 골동품들을 이전하는 일에는 관여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계속해서 그는 "일단 우리가 어떤 유물을 발견하면 그것을 총독부로 가져갔습니다. 그런다음 그는 일왕에게 보낼 것을 선택했습니다."라며 동의했다.
일본의 고위관료들도 그들 나름대로 적극적으로 문화재 약탈에 참여하였고 막대한 수집품들을 쌓아놓고 있었다.4년후에 살해당한 제1대 총독 이토오 히로부미(이등박문은 총독이 아니라 통감이였다.이글을 쓴 기자는 총독으로 지칭함-역주)는 1000점 이상의 도자기를 소유하고 있었다.3대총독 마스테카 데라우치는 1885점의 서예작품과 432권의 서책과 2000점이상의 도자기, 거울등과 다른 유물들을 모았다.데라우치의 수집품들은 야마구치 여자대학에 보내졌고, 한국고대사의 일본학술원회원인 남영창씨에 따르면 나중에 한국에 보내진 것은 수집품중에 극히 일부라고 말하고 있다. 동경 인근의 츄다주큐대학의 예술사교수인 소지 다카사키는 모든사람들이 식민지에서 구한것이라는 것을 알고있다고 말하고 있다.즉 일본인들은 직업을 얻거나 사업계획을 위한 승인을 얻기위해 골동품이나 조상들을 데라우치에게 선물로 산더미처럼 갖다바쳤다.
일본전력회사의 사장으로서 1903년 한국에 온 다케노수케 오구라와 같은 탐욕스러운 사업가들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수집품중 상당수-대략 1100점- 는 동경국립박물관에 있다.이 중에는 청자꽃병, 청동불상, 값을 먹일 수도 없는 5세기 말에서 6세기초기 가야왕조의 어느왕의 무덤에서 출토된 금관이 포함되어 있다. 오구라는 매장문화재에 너무나 집착하여 한국인들은 그를 두더지라 불렀다.다카사키는 "오구라는 나쁜놈들 중 하나였습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한번에 수십점씩 돌아가면서 유리전시관에 전시되고 있는데, 많은 곳에 "출토 미상"이라고 표시되어 있다.국립박물관의 수석박물관장 도이오노부 다니는 "우리는 일본인 한국인 중국인들을 위한 학술적 목적에 사용할 수 있도록 유물들을 아주 잘 돌보고 있습니다."라고 말하고 있다.그는 어떤 유물들을 돌려달라는 한국정부와 개별적인 한국인들의 요구에 대하여 아무것도 모른다고 딱잡아 뗐다.
이것을 보고도 근대화라는 말이 나올까....
조선근대화는 토착왜구들만 쓸 수 있는 말이다.
참 많은것 같습니다.
근데 왜 그리 힘없이 그런 넘들한테 나라를 그렇게 빼았겼는지에 대한 반성글의 별로 없더군요.
상대의 악행은 이미 벌어진 일 입니다....왜 내게 그런일 벌었졌는지 대한 성찰 과 분석 반성의 글이 더 중요하다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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