님 웨일즈의 소설 아리랑에서 김산이 김원봉을 회상하는 구절이 있다.
"그는 고전적인 유형의 아나키스트로 냉정하고 두려움을 모르며 개인주의적인 사람이였다
말이 없었고 웃는 법이 없었으며 도서관에서 독서를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1898년 밀양에서 태어나 중앙학교에서 수학하고 만주로 건너가
신흥무관학교를 중퇴하고 1919년 11월 중국 길림성 파호문에서
의열단을 창설하고 단장이 된다. 단재 신채호 선생에게 의혈단선언문을
작성해 달라고 간청하여 마련된 것이 조선혁명선언이다.
민중은 우리 혁명의 대본영이다.
폭력은 우리 혁명의 유일 무기이다.
우리는 민중속에 가서 민중과 손을 잡고 끊임없는 폭력
암살,파괴,폭동으로써 강도 일본의 통치를 타도하고
우리 생활에 불합리한 일체 제도를 개조하여
인류로써 인류를 압박치 못하며
사회로써 사회를 수탈하지 못하는 이상적 조선을 건할지니라.
조선총독부 폭파사건,다나카 기이치 저격사건,종로경찰서 폭파사건
밀양경찰서 폭파사건,도쿄 이중교 포탄사건,부산경찰서 폭파사건
김달하,박용만등 친잂파 암살등 테러와 암살을 감행하였다.
일제는 김구에게는 60만원의 현상금을, 김원봉에게는 100만원을 걸었다.
당시 100만원은 현재 가치로 300억원에 달한다.
장개석 정부의 지원을 받아 1932년 조선혁명군군사정치간부학교의 교장으로 일했다.
125명의 독립군 전사를 양성했다. 저항시인 이육사도 이 학교를 졸업했다.
1938년 10월 조선의용대를 창설하고 중국군을 도왔으나 중국 공산당에
가입하지 않았고 코민테른(국제공산당)과 연계하지도 않았다.
1945년 광복과 함께 임시정부요인들과 함께 귀국했다.
김원봉이 구속된 것은 1947년 3월 22일이다.
전국노동조합평의회의 총파업 배후인물로 몰린 것이다.
중부경찰서에 구금된 김원봉은 일제하 최악의 친일경찰이었던
노덕술에게 구타와 고문을 당했다. 김원봉은 풀려나자마자
전 의열단원 유석현 집에 가서 꼬박 사흘간 울었다고 한다.
당시 수도경찰청장이 장택상이였고 약산의 의혈단시절
친일부호 장승원을 암살했는데 장택상의 아버지였다.
김두한의 회고에 따르면 이승만이 불러서 갔더니
"공산당은 중대한 문제인데 미스터 김이 빨리 처리해 주기 바란다"
그는 대한임시정부 군사부장으로 왔는데 의혈단단장으로 무서운 사람이거든요
김규식 박사 대신해서 나오려는 김원봉을 내가 습격했어요. 라고 증언했다.
1948년 그는 김구와 김규식이 주도한 평양에서의 남북협상에
참가한 뒤 서울로 돌아오지 않았다.
월북 후 국가검열성상, 노동상 등 요직을 지냈지만
1958년 김일성이 남로당파,연안파,소련파 등을 숙청할 때 함께 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남에서도 북에서도 이용만 당했군요
일본을 부쉈더니 이승만이 김일성이가 돌아가시게했네요
감사합니다 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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