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성균웹진(https://webzine.skku.edu/skkuzine/section/knowledge.do?mode=list&articleNo=93247)
날이 금세 차가워졌다. 가끔 우리는 어떤 온도의 역사에 살고 있는 걸까 하는, 그런 추상적인 생각이 스쳐갈 때가 있다. 우리 역사는 슬프게도 추운 역사가 많았다. 지정학적 위치 때문일까 내 나라가 내 나라가 아닌 순간들이 존재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아픔은 일제 강점기가 아닐까 싶다. 우리는 일제 강점기에 대해서 일제의 조선 수탈의 관점으로만 바라보곤 한다. 하지만 누군가는 일제가 조선을 억압하고 착취한 것뿐만 아니라 물적·인적 자원을 개발하면서 조선을 근대화시켰으며 나아가 1960년대 이후 한국 사회가 신흥 공업국으로 발전하고 선진국으로의 도약을 도모했다고 말한다. 이로부터 일제 강점기를 바라보는 두 가지 시선이 나온다. 하나는 일제 강점기를 수탈과 억압적 지배로 점철된 수난의 역사로 바라보는 ‘식민지 수탈론’이다. 다른 하나는 일제 강점기가 일본에 의해 철도·병원 등의 근대적 시설이 건설되고 근대적 제도(관료제, 토지제도, 경찰, 검찰 등)가 도입됨으로써 한국이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이 형성된 시기라는 ‘식민지 근대화론’이 있다. 두 시선이 무엇이고 그것을 통해 어떻게 역사적 사건을 바라볼 수 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 식민지 수탈론 ? 내재적 발전론
식민지 수탈론의 대표적인 학자인 신용하는 일제의 식민지 정책이 다른 제국주의 국가들의 식민지 정책과 마찬가지로 한국 민족에 대해서 사회경제적 수탈을 극대화함과 동시에 다른 제국주의 열강들의 식민지 정책과 달리 한국민족을 지구상에서 영구히 소멸시켜 버리려는 ‘한국민족 말살정책’을 강행하였다고 주장했다. 아울러 일본 제국주의 식민지 지배 하의 조선에서 ‘근대화’가 이루어졌다고 파악하는 식민지 근대화론은 식민지 시기 일본 제국주의가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해 내세웠던 지배 이데올로기의 재정립에 불과하다고 그 허구성을 지적했다. 일본 제국주의 지배의 본질은 조선의 자주적인 근대화를 저지하고 수탈한 것에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 식민지 근대화론
식민지 근대화론의 대표적인 학자인 이영훈은 조선 후기 한국 사회 성격을 서유럽의 전근대와 상이한 소농 사회로 규정한 다음 한국사의 ‘근대=자본주의’는 밖에서부터 이식될 수밖에 없었다고 주장했다. 식민지 근대화론을 대표하는 또 다른 연구자인 안병직은 한국 근현대사 연구의 새로운 패러다임으로서 ‘경제발전론’을 제시했다. 경제 발전이라는 시각을 가지고 조선 후기, 식민지 시기, 해방 이후를 일관되게 파악하는 것이 한국 근현대사의 연구 방향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식민지 시기의 사회 경제 구조가 1960년대 이래의 경제개발 계획의 실천으로 성립한 한국의 자본 주의 배경이 되기에 조선 후기와 해방 이후를 연결하려면 한국 근현대사에서 식민지 시기를 포함해야 한다는 게 요지다.
◐ 시선의 분리 ? 일제강점기 역사적 사건을 중심으로
- 토지조사사업
토지조사사업은 식민지 근대화론과 식민지 수탈론의 시각이 상반되는 대표적인 역사적 사건 중 하나이다. 일제는 토지조사사업을 통해 보다 효과적으로 세금을 걷고 인력을 동원하기 위해 토지와 인구를 조사했다. 토지조사사업은 8년간 2천만 원을 투자했으며 조사 사무와 측량 사무로 나누어 진행했다. 사실 식민지 수탈론과 식민지 근대화론의 논쟁에 있어서 가장 많은 의견을 펼친 학자는 신용하 교수와 이영훈 교수이다. 「조선토지조사사업의 지적학적 성격에 관한 연구」를 보면 두 사람의 토지조사사업에 대한 의견 차이가 나와 있다. 순서대로 살펴보자.
첫째로, 조선토지조사사업은 침략설에 기반한 식민지 수탈 목적이었다. 이영훈 교수는 「반일종족주의」에서 40% 수탈설은 역사학자들이 아무렇게나 지어낸 수치라고 주장하는 반면 신용하 교수는 토지조사 분쟁 사례와 저항 행태를 보면 이 사업의 목적은 약탈이 분명하다고 주장한다. 조선토지조사사업의 목적이 식민통치의 일환으로 일제의 토지 점유를 합법화했다는 것이다. 둘째로, 조선토지조사사업으로 조선에 토지소유권이 확립되었다는 주장은 진실을 왜곡시킨 것이다. 조선토지조사사업에 의한 토지소유권 확립의 문제로서 이영훈 교수는 조선토지조사사업으로 근대적 토지 소유권 제도가 확립되었다고 주장하는 반면 신용하 교수는 일제 토지조사사업 보고서 설명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 형성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전혀 일치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즉 이는 기존에 토지 소유권이 없다가 일제가 건너와서 확립시켜준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 하지만 대한제국에서 실시한 토지조사사업으로도 충분히 토지소유권 확립이 가능했다는 점을 볼 때 근거가 부족하다고 할 수 있다. 셋째로, 식민지 근대화론은 식민 지배의 합리화 술책이라는 점이다. 이영훈 교수는 한국이 이 정도 사는 것이 일본의 덕택이라는 인식이 자리 잡고 있다. 반면에 신용하 교수는 식민지 정책상의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 조선토지조사사업의 본질임을 강조한다. 결국 토지조사사업은 식민지 통치의 사회정치적 기반을 강화하기 위한 식민지 정책의 일환이면서 가장 큰 목적은 많은 토지를 수탈하는 데에 있었다는 것이다.
- 산미증식계획
일제가 조선의 쌀 생산량을 늘려 식량공급지로 만들려 했던 이 계획도 식민지 수탈론과 식민지 근대화론의 관점이 상반된다.
김낙년 교수는 미곡 거래의 경우에 일반적으로 이루어지는 경제적 거래이지 수탈한 것으로 볼 수 없다고 주장한다. 주권침탈과 지배체제 유지를 통한 식민 지배는 강제성을 수반하지만 이를 일상적 거래가 이루어지는 경제 영역까지 확대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다. 나아가 허수열 교수는 일제 시대의 거의 모든 경제관계는 교환관계를 통해 이루어졌고 이럴 때는 폭력적인 방법 혹은 경제외적인 방법으로 빼앗아간다는 뉘앙스의 수탈이라는 말은 본질을 흐릴 수도 있다고 말했다. 물론 산미증식계획은 일본으로의 미곡 이출량을 증가시켜 일본제국주의 차원에서는 소기의 성과를 거둔 것이었지만 식민지 조선에서는 식민지 지주제가 확대, 심화되었고 그로 인한 농촌 사회의 갈등과 모순은 증폭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생산력 측면에서는 계획이 진행되던 당시는 많은 자금과 인력이 투하되었던 것에 비해 별다른 생산력적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1930년대 이후에야 그 성과가 일정 정도 나타날 수 있었다고 한다.
- 조선공업화정책
1930년대 일제가 실시한 조선공업화정책은 과연 한국인들을 수탈해서 일본의 이익을 창출하려 했던 것인지, 아니면 한국의 발전을 도모하는 ‘근대화’ 정책 중 하나였는지에 대해서 식민지 수탈론과 식민지 근대화론은 반대되는 입장을 지닌다. 조선공업화정책에 대해서 식민지 수탈론은 조선의 경제가 파행적인 식민지적 특성을 가진다고 주장한다. 먼저 조선공업이 일본의 독점자본에 의해 장악되었고 국내 재생산과의 연관이 결여되면서 일제의 원료 약탈과 관련하여 불균등한 성장을 이뤘다. 중공업과 경공업의 낙후와 함께 일본에 예속되면서 공업 생산 배치에서 식민지적인 편중을 이룬 것이다. 조선인 노동자들은 일본인 노동자의 절반도 되지 않는 임금을 받으며 열악한 작업환경 속에서 장시간 노동에 혹사당했다. 따라서 조선 경제는 자립적인 발전이나 정상적인 성장과는 거리가 먼 일제의 수탈을 위해 편성 및 배치되었고 수탈에 필요한 부문만 확대·성장했다고 할 수 있다.
이와 반대로 식민지 근대화론은 일제 식민지 지배가 낳은 근대적 측면을 발견한다. 일제의 수탈만을 일방적으로 강조하는 식민지 수탈론을 부정하고 1930년대 공업화가 가져온 개발의 측면이나 근대화 측면을 부각시킨다. 1930년대 들어 일본으로부터의 투자가 증가하면서 자본형성의 중점이 은행·금융에서 공업으로 옮겨지고 농촌으로부터의 노동력 유출과 자본에 의한 포섭이 급속히 진행되었다. 이러한 급속한 자본주의화를 반영하는 것이 무역·공업 구성 및 소비시장의 변화이다. 1930년대 대일 무역에서 무역액이 급신장하면서 수출에서 공업제품의 비중이 상승하고 공업제품의 수입에서 소비재의 비중이 저하하고 생산재의 비중이 상승하며 수출에서 원료재·중간제품 등의 생산재가 높은 비중을 차지하게 된다. 공업생산에서는 소비재의 비중이 줄어드는 반면 생산재의 비중이 상승하여 조선 사회 내부의 사회적 분업이 재편됨에 따라 소비시장이 급속도로 확대된다. 공업제품의 소비에서 소비재의 소비가 확대되며 동시에 생산재의 소비는 더 빠르게 증가되었다. 조선인 자본·조선인 노동력의 변화는 일제 및 일본 독점자본에 대한 조선인의 대응에 양적 발전과 더불어 질적 발전도 가져왔다. 노동력 부문에서 1930년대 공업화로 노동자가 양적으로 크게 성장했으며 숙련노동자가 증가하며 조선인 노동자가 질적 성장을 이뤘다. 식민지 수탈론과 다르게 개발, 자본주의화라는 근대적 측면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 마치며
문득 그동안 일제 강점기를 어떻게 바라봤었나 하는 고민이 든다. 너무 수탈론적으로 바라봤던 게 아닐까 생각이 들면서도 수탈이 본질이라는 생각은 지울 수가 없다. 일제 강점기 속에서 많은 사람들은 폭력성과 강제성으로 인해 고통받았다. 어쩌면 식민 지배 속에서 일본의 근대성이 한국으로 일부 이전된 부분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과연 우리가 일제 강점기라는 시기에 대해 본질적으로 물음을 던져야 하는 지점이 무엇인지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 볼 필요는 있지 않을까 싶다.
학교에서 한국사 교육 레알로 엉망진창으로 시키는가 보네요
올바른 역사를 가르치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그때 조직적으로 일본이 방해해요. 미국회사의 시공역량 대한제국의 정치적 불안등등을 근거로 미국 투자자들을 흔들고 미국회사는 결국 공사를 일본 자본에 넘겨주게 됩니다.
일본으로 인해 근대화된게 아니라, 우리가 근대화되는 과정에서 일본이 수탈해 갔다고 보는 게 타당합니다.
박정희가 아니면 경부선 못깔았다고 하는 거랑 똑같아요.
0/2000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