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정민씨는 1987년 강원도 정선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두 살 터울의 남동생을 낳다 죽었다. 아버지는 두 아들을 기를 형편이 안 됐다. 죽은 어머니의 친구가 자신의 언니에게 양씨 형제 사정을 전했다. 친구의 언니 부부는 갓난 양씨 동생을 양자로 들였다. 양씨는 양씨의 조부모가 거두기로 했다.
양씨 동생을 맡아 기르던 박정하씨 부부는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양씨를 다시 만났다. 양씨는 박씨 부부가 봉사하러 간 천주교 복지시설에서 아이들과 어울려 놀고 있었다. 양씨가 다섯 살 때였다. 조부모가 기른다던 양씨가 어째서 고아원에 와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아이들 사이에서 어린 양씨는 박씨 부부를 낯설게 올려다봤다. 참담해하는 박씨 아내의 등에는 양씨 동생이 업혀 있었다.
박씨 부부는 양씨를 입양하려고 했다. 시설 관계자는 안 된다고 했다. 서류상 친권자인 생부가 자취를 감춘 탓이었다. 양씨 동생은 생부에게 동의를 얻고 입양했었다. 박씨 부부는 대신 남모르게 양씨를 후원했다. 어린 양씨 형제가 자신들의 관계나 가정사를 받아들이기엔 시기상조라고 생각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양씨는 정선을 떠나 서울로 왔다. 함께 상경한 고향 친구들과 자취하며 일거리를 찾았다. 술집 종업원으로 일하다 최근 경호업체에 취직했다. 병무청에서 육군에 입대하라는 영장이 날아왔다. 고아원에서 혈혈단신으로 자랐지만 서류상으로 생부가 살아 있어 병역을 면제받지 못했다. 소식도 얼굴도 모르는 아버지의 그림자가 평생 양씨의 삶을 움켜쥐고 놔주지 않았다.
지난달 17일 새벽 서울 잠실동 천주교성당 앞에서 양씨는 비틀거리며 걷고 있었다. 회사 동료들과 회식을 마친 뒤 친구들과 한잔 더 하고 집으로 가던 길이었다. 만취한 양씨는 마주오던 청년들과 어깨를 부딪쳤다. 시비가 붙었다. 청년 7명 가운데 3명이 달려들어 폭행했다. 양씨는 제대로 저항하지 못하고 길바닥에 쓰러졌다. 행인과 차량이 그 옆을 오갔지만 아무도 말리거나 신고하지 않았다.
당시 달아났던 이모(20)씨 등 3명은 경찰에 붙잡혀 상해치사 혐의로 구속됐다. 경찰은 폭행을 막지 않은 일행 4명 중 3명을 방조 혐의로 불구속 입건하고, 군에 입대한 1명은 혐의를 군에 통보했다. 양씨는 뇌사 상태로 중환자실에 입원했다.
양씨 방에서 가족관계증명서와 주민등록등본이 나왔다. 남몰래 생부를 찾아다닌 것이었다. 박씨 부부가 수소문 끝에 찾아낸 양씨 생부는 사정이 여의치 않았다며 몸 둘 바를 몰라 했다. 이어 병실을 찾은 양씨 할아버지는 아내와 이혼하면서 손자를 고아원에 맡겼다며 미안해했다. 이들의 사죄는 부질없었다. 양씨는 다시 눈을 뜨지 못하고 지난 6일 숨졌다.
양씨를 챙긴 피붙이는 동생뿐이었다. 군복무 중인 그는 입대 전 형을 만나려고 종종 서울을 다녀갔었다. 지난 8일 화장한 양씨의 유해는 동생의 요청으로 강원도 벽지의 생모 산소 주변에 뿌려졌다.
박씨는 “사람들이 상대 입장을 조금이라도 생각해 봤다면 생명을 보호할 수 있었을 것”이라며 “다들 자신만 돌보고 서로에게 관심을 갖지 않는 현실이 가슴 아프다”고 했다.
P S: 가정사로도 많이 힘들고 괴로웠을텐데...그래도 열심히 살려고 하신분같은데..
삼가고인의 명복을 빕니다.요즘 얘들이 겁들이 너무없네요.우리때랑 틀려요.이젠..
그날 술만 만취가 안되셨더라면 이런일도 없었을텐데...길가시던 행인 분들 또한 무관심으로 지나가셨다는 얘기에 요즘사회가 왜이리 병폐 되어가는지...고삐리일행중에 옭고 그름을 판단할 능력도있는 그런녀석들도 없었다는게 씁쓸하네요.
그것도 애비라고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