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장면이 기억납니다.
저와 작은누나는 엄마손을 잡고 큰누나는 쫄래쫄래 엄마를 따라 갔던
그곳이 유치장이었단걸 성인이 되어서 알았습니다.
많은 기억이 있지는 않지만
아주 어렸을적엔 아버지랑 같이 했던 좋은 기억이 정말 없네요.
같이 목욕탕을 가서 좋아보이는 면도기를 아버지가
챙기라고 해서 제가 면도기를 챙겼는데
나중에 면도날을 안챙겼다고 대가리가 썩어빠졌냐고 말씀하시던
그 기억이 단한순간도 잊혀지질 않습니다.
학교도 가기전 그 꼬마가요..
어머니 일주일 집나갔을때
아버진 3일에 한번 들어오셔서 큰누나한테 만원짜리 몇장 쥐어주고 갔었죠.
어머니가 매일 전화 해서 안부 물었던것도 기억나고
오래지 않아 자식들 걱정돼서 그냥 들어오셨던 기억도 있습니다.
새벽에 일어나서 저는 방앗갓에서 찹쌀떡을 만들었고
낮에 학교갔다와서는 시장에서 찹쌀떡을 팔았습니다.
그 무거운 구르마를 끌고 10리 가까이 떨어진 시장을 혼자서요..
애들이 팔아야 안쓰러워서 잘팔린다고..
초등학교때 일입니다.
툭하면 밥상을 엎고
툭하면 싸웠습니다.
너무 어려서 이혼 이런건 뭔지도 몰랐을때입니다.
우리 다섯식구 방에 앉아
맛있는 밥을 먹었던 기억이 있는데,
갑자기 어머니가 숟가락을 놓더니 부엌에 가서
혼자 펑펑울고 계셨습니다.
저도 밥먹다 말고 부엌에 가서
'엄마 왜울어?'
하고 물었던것도 너무 생생하게 기억이 납니다.
연탄불 떼던 그 집에서요..
이렇게 살면안되겠다고 다짐했던게 고3.
반에서 일등하면 뭐해주실거냐고 물어봤을때
10만원 주신다고 하시고,
그 10만원 때문에 고3때 전교 2등을 했습니다.
성적표를 보고 믿지 않으시고 거짓말 하지 말라고 하던 아버지.
졸업이후에 지금까지 단 한순간도 쉬어본적이 없습니다.
저는 살면서 생긴,
아니 억지로 만든 좌우명이
'아버지처럼 살지 말자'
입니다.
평생을 그 기억으로 살아왔고
평생을 그 다짐으로 살았습니다.
지금은 그 누군가의 남편이고
4살아들 3살 딸의 멋진 아빠라고 자부 합니다.
빚으로 시작한 가정이
지금은 집도 있고 차도 있습니다.
너무나도 좋은 아버지가 되길 항상 생각하며
부끄럼없이 좋은 남편과 아버지로 살아갈것을
다짐하고 또 다짐했습니다.
손주들을 데리고 어머니 아버지 집으로 주말에 놀러가면
한 없이 자상한 아버지를 보고
도무지 적응이 안됩니다.
아직도 적응이 안됩니다.
얘기를 입밖으로 꺼낸적은 없지만
아주 어렸을때부터 생긴 그 트라우마는
저를 평생 괴롭혔습니다.
그래서 지금 나오는 이 눈물이
화가 변해서 생기는것인지 이제는 행복해서 생기는 것인지
헷갈립니다.
아버지 이제는 우리 가족 다 행복하잖아요?
어머니도 항상 웃으시고 아버지 변했다고 좋아하시고,
행복하다 하시잖아요?
37년 살면서
오늘 어버이날은
제 스스로 대견합니다.
어제 4살배기 아들놈이 카네이션을 만들어 왔거든요.
생전 처음으로 카네이션을 아버지란 이름으로 제가 받아 봤거든요..
.
.
.
그동안 엄마는 이해할 수 있었지만
아빠는 이해할 수 없었어요.
근 5년간 옛날처럼 마음아픈일은 없었지만
쉬이 사라지지 않는 옛날의 제가 오늘만큼은 너무 슬프네요...
아버지..
그래도 오래사세요..
그래야 평생을 아빠한테 바쳐온 엄마에게 잘할 수 있잖아요..
.
.
그래야 하잖아요..
오늘부터 좀 바껴볼게요..
아버지 사랑합니다.
어머니 사랑합니다.
0/2000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