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3편.
조선민중이 한 편이 되고 일본 강도가 한 편이 되어 네가 망하지 않으면 내가 망하게 된 정황에서 우리 2천만 민중은 하나가 되어 폭력파괴의 ~(이어서 아래에)
길로 나가야 한다고 력설하였다.
이것은 그가 림시정부를 조각하는 자리에서 폭탄같이 내던진 유명한 말이다.
그는 림시정부를 탈퇴한 후 발표한 ≪조선혁명선언≫에서도 리승만을 호되게 비판하였다.
이런 혁신적 (입)립장은 그로 하여금 리승만과 같은 사대주의자, 야심가가 수반으로 군림하고 있는 상해림시정부에서 각원으로 남아있을 필요를 더는 느끼지 않게 하였으며 결국은 림정과 결별하고 길림으로 활동무대를 옮기는 용단을 내리게 하였던 것이다.
나는 이 례배당에 자주 찾아가 풍금도 타고 연예선전대의 활동도 지도하였다. 손정도 목사가 우리가 요구하는 것이면 무엇이건 다 해결해주고 우리의 혁명활동을 충심으로부터 지지해주었기 때문에 나는 그를 친아버지처럼 따르고 존경하였다. |
김일성은 해석이 단재의 ‘무력항쟁 노선’에 전적으로 동의한 것으로 회상하고 있습니다. 이제까지 남측의 학계에서는 해석의 사상을 주로 도산 안창호와의 관계 속에서 고찰해왔습니다. 그런데 김일성의 회상에 의하면, 해석은 도산의 ‘실력양성론’에 반대하지는 않았으나 ‘반신반의’했으며, 오히려 단재의 ‘무력항쟁론’을 전적으로 지지하였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단재와 해석, 그리고 김형직의 노선이 ‘무력항쟁’의 기치에서 일치하고 있는 것입니다.김형직 또한 독립운동에 나선 초창기부터 무력항쟁 노선을 표방하였으며, 그가 주도적으로 결성한 ‘조선국민회’ 역시 간도에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고 무력으로 일제를 타도해야 한다는 ‘무력항쟁 노선’을 표방하였습니다.
해석이 1912년 진도 유배형을 받을 때의 죄목이 북간도에 무관학교를 세우고 독립운동의 기지를 마련했다는 것이었습니다. 1918년 조선국민회 사건으로 체포된 김형직 역시 간도에 독립운동 기지 건설을 추진하였습니다.
● 손정도 목사와 고려혁명당
1918년 일제에 의해 체포된 조선국민회 회원은 대부분 기독교계 인사였으며, 하와이계와 만주계를 제외한 국내계는 거의 모두가 다 숭실중학 동문들이었다는 점에서 해석과 조선국민회 사이에서도 일정한 사상적 유대가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상적인 유대에 기초하여 해석은 민족주의에서 공산주의로 방향의 전환을 모색하던 김형직과 연대할 수 있었고, 공산주의자의 길을 선택한 김성주(일성)를 친아버지의 사랑으로 지지하고 보호해 줄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해석손정도와 김형직의 유대는 1926년 고려혁명당 결성에서 절정에 이릅니다. 1925년부터 김형직은 만주 일대에서 독립운동을 통일적으로 영도할 수 있는 ‘민족유일당’을 건설하기 위한 사업에 착수하면서 해석과 재회하게 됩니다. 북측에서 발간한 김형직의 전기는 이 만남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습니다.
김형직 선생님께서는 길림에 머무르시는 기간 당시 길림에서 활동하고 있던 손정도 목사와도 만나시였다. 손정도 목사는 한생을 반일애국사업에 고스란히 바쳐온 지조가 굳고 량심적인 독립운동자였다.
손목사는 길림에서 교직자의 간판을 가지고 혁신계 인물들과 함께 시대의 변천에 순응하는 독립운동의 방향전환과 애국력량의 단합을 위해 꾸준히 노력하였다.
|
이 전기는 해석과 김형직의 만남이 있은 지 1년 후인 1926년 4월 5일에 국내에서 온 천도교 혁신파 대표와 형평사 대표, 연해주에서 온 대표들과 함께 만주의 독립운동자들이 연석회의를 열고 ‘현금의 사유재산제도를 소멸하고 현존한 국가조직을 철폐하여 공산제도에 의한 세계 단일국가 건설’을 목적으로 하는 ‘고려혁명당’을 결성하였다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또한 고려혁명당의 의의에 대해서는, ‘고려혁명당이 창건됨으로써 만주일대의 반일독립운동단체들과 자치조직들에 대한 정치적 령도기관을 가지게 되였으며 반일독립운동대렬의 단합을 이룩하며 전반적 반일민족해방운동을 방향전환의 길을 따라 통일적으로 지도할 수 있는 정치적 령도조직을 가지게 되었다’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해석이 고려혁명당에 이름을 올리지는 않았지만, 고려혁명당의 주요 인사들인 양기탁, 오동진, 장철호, 양세봉, 최동오, 김시우, 김사헌, 현정경 등과의 친분관계를 고려할 때, ‘바다 돌’이라는 그의 호처럼 드러나지 않게 민족유일당으로 창건된 고려혁명당을 지지하고 성원하는 역할을 감당하였을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해석 손정도 목사는 김성주(일성)의 부친인 김형직과 지연과 학연을 같이 하는 세상적 인연에 더하여, 민족의 자주와 독립을 간절히 바라는 애국심을 공유함으로 인하여 한 차원 더 높은 동지적 관계를 맺게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해석의 사상은 민족주의에서 시작하여 공산주의에로 방향을 전환한 김형직의 사상 궤적과 유사하게, 말년으로 갈수록 ‘혁신계’ 공산주의 운동을 지지하는 방향으로 기울고 있었다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해석은 김형직과 ‘사상과 이념의 공통성’에 기반한 ‘동지적 애정과 의리’를 지니고 있었기에, 김형직 사후 그의 장남인 김성주(일성)를 ‘친아버지의 사랑’으로 맡아 3년 동안이나 보호하고 돌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상..끝
0/2000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