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때는 환향녀 라는 말이 없었다
실제로 조선시대에는 아예 사용되지 않았으며, 일제강점기에도 화냥년(창녀ㆍ바람핀여자)의 어원을 '환향(還鄕)'에서 찾은 사례는 없다.
당대의 조선왕조실록 기록에는 '환향' 대신 돈을 주고 데려온다는 뜻으로 '속환(贖還)'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다만 속환되어온 자들을 모욕하는 경우도 있어
인조와 상당수의 양반들조차도 너무하는 거 아니냐고 비판했을 정도다.
그리고 청군이 포로를 특히 여자들을 델고 갈때는 그래도 연약하다고 말을 내주기도 하고 그걸 남자 조선포로들이 끌게 했는데,
남자 포로들이 지금 오랑캐들에게 잡혀가는데 '정절을 지켜라!'라고 여자들을 말에서 끌어내려 죽이기도 했다는 얘기가 있다.
당시 조선포로 들이 청나라보다 지식수준이 높았다한다
전 승지 한이겸은 자기 딸이 사로잡혀 갔다가 속환되었는데
사위가 다시 장가를 들려고 한다는 이유로 그의 노복으로 하여금 격쟁하여 원통함을 호소하게 하였다.
형조에서 예관으로 하여금 처치하게 하기를 청하였다.
『인조실록』 16년 3월 11일
속환해온 여인들에 대한 부당한 비난과 박해에 그녀들을 보호하고자 했던 깨어있던 관료들도 있었다.
그 중 대표적인 자가 지천 최명길이었다.
그가 이르기를
청나라 병사들이 돌아갈 때 자색이 자못 아름다운 한 처녀가 있어 청나라 사람들이 온갖 방법으로 달래고 협박하였지만 끝내 들어주지 않다가 사하보에 이르러 굶어 죽었는데 청나라 사람들도 감탄하여 묻어 주고 떠났다고 하였습니다. 또 신이 심양에 관사에 있을때, 한 처녀를 값을 정하고 속하려고 하였는데 청나라 사람이 뒤에 약속을 위배하고 값을 더 요구하자, 그 처녀가 돌아갈 수 없음을 알고 칼로 자신의 목을 찔러 죽고 말았습니다. 이에 끝내는 그녀의 시체를 사가지고 돌아왔습니다.
의외로, 전쟁의 원흉 중 하나이자 암군으로 평가받는 인조도 최명길의 주장에 매우 동감하며 "부녀자들을 내치지 말라"고 명을 내렸다.
그러나 이미 연이은 전쟁의 패배로 인해 정말이지 병신 인증 하나는 제대로 했던 그의 말을,
신하들이 제대로 듣지 않은 면도 있었다 사대부의 자제들과 대표적인게 산림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병자호란에서 비롯되었다는 잘못된 속설이 나도는 단어로 호로자식이 있다. 어원에 대한 여러가지 설 중 하나가 병자호란때 끌려간 여인들이 강간당해 낳은 사생아를 말한다지만 이 역시 사실이 아니다. 호로(胡虜)는 오랑캐를 뜻하는 말이니 호로자식은 그냥 오랑캐에 빗대어 욕하는 것일 뿐이다.
역사에 만약은 없지만
당시 조선이 병자호란 때 항복한것은
첫째 이괄의 난으로 이후 군사가 많은 것을 경계까지 했었고 그리하여 이괄의 부하가 청에 투항하여 병자호란때 청도 지면 큰일나는
나라의 운명을걸고 처들어온 (능양군 의 일도있지만) 그들에게 길잡이 노릇을 해버렸다
둘째 당시 조선이 그들을 막을 여력이 안되는건 아니었는데 아싸리 선조처럼 도망이라도 잘갔으면 조선이 충분히(?)승리할수 있었던것을 겨우 남한산성 으로 가는 바람에 항복하였다
지금이나 그때나 변한게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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