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관은 조선시대에 일본인이 건너와서 통상하던 곳을 말하며, 그 곳에 설치된 행정
기관과 일본인 집단 거주 지역을 일컬어 부르는 말이다.
대구 사람이 왜 그렇냐? 라고 물으면 칠곡읍과 칠곡군이 상당부분 대구에 흡수된
히스토리를 거슬러 올라가 칠곡 왜관의 위치를 들여다 보아야 함.
과거 왜관은 칠곡군 약목면 관호리에 있었으나 1905년 경부선 철도를 부설할때
관호리 보다는 낙동강변의 넓은 지대가 장래성 있다 판단하여 왜관역을 설치했고
현재까지도 칠곡의 중심지로 남아있음.
칠곡읍은 1981년 7월 대구에 편입되었고 대구의 상당수 부모세대는 칠곡읍에서
대구로 넘어온 케이스가 많음. 물론 의성군이나 성주군, 영천 등지에서도 많이
넘어옴.
고려 말기에 왜구가 날뛰자 정부는 유화책으로 내이포(현 창원시 진해구 )와 염포
(울산광역시 북구 염포동), 부산포[(부산광역시 동구) 근처의 항구를 개항해 일본인들이
왕래하고 무역하는 것을 허가하였다
임진왜란 이후 국교가 단절되었다가 에도 막부와의 관계가 호전되면서 왜관은 다시 나타난다.
1601년 절영도[(부산광역시 영도) 에 임시로, 1607년 두모포[(부산광역시 수정구)에
1만평 규모의 왜관을 만들었는데 술집과 일본식 주택이 지어졌다.
건설을 추진한 이들은 주로 쓰시마 번주였다. 그러나 당시에 이 부근이 교통이 불편하고,
1만평 규모였던 두모포왜관이 너무 좁다는 불만이 많아 1678년 초량에 10만평 규모로 왜관을
신설했다. 다만 이 지역은 현재의 일본국 영사관이 위치한 동구 초량동이 아니라,
본래 초량이라는 지명은 중구, 서구 일대를 부르던 지명이었는데 나중에 의미가
확장되어 현재의 초량동은 조선 후기에 신초량으로 불리며 의미가 확장되었다.
초량왜관이 있던 곳은 구초량에 속하는 중구 일대이다. 그러다 1867년 부임한
동래부사 정현덕이 같은 고을에 초량이 둘 있다고 구초량을 다른 지명으로 바꾸어
신초량이 그냥 초량이 되었다.
본래 두모포왜관이 있던 자리는 고관(古館)이라 불렀는데 지금도 초량역에서
안쪽으로 들어가면 고관입구라는 지명이 있다.
해서 나라를 팔아먹어도 우리는 뻘건색 찍는다는 건 다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전라도 가면 거의 파란당 이겠지만 차이점은 말이 안 통한다는거;;;
불리하면 아 됐어 됐어~~!! 이러고 개무시;;; 지역 특색같긴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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