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추천도서 현수성이 간다.
이달의 추천도서로써 요즘같이 혼란스런 시대에 현수성 같은 사람이 있다는 것 자체로
뭔가 위로받고 있다는 생각에 추천을 하고 싶은 책이네요.
일본 신주쿠 가부키쵸에서 직접 역자 장은선씨가
현수성 구호센터 소장을 만난 이야기가 있길래 담아봅니다.
<가부키쵸 1번가에 있는 신주쿠 구호센터>
따뜻한 4월 말의 봄날 정오. 나는 일본 최대의 환락가라는 가부키쵸 일번가 위에 서 있었다.
등 뒤에 펼쳐진 공원에서 농구하는 소리가 떠들썩하게 들려온다.
맞은편 건물의 연두색 간판을 지긋이 바라보고만 있은 지 7분째.
문제의 간판에는 ‘신주쿠 구호센터 ~커뮤니티 카페 현~’이라고 적혀 있었다.
가슴이 뛰었다.
지난 한 달 동안 번역하느라 붙잡고 씨름했던 원고 속의 주요 무대가 바로 눈앞에 펼쳐져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현실감이 없었다. 오히려 「현수성」이라는 제목의 만화나 드라마 속으로
이어지는 입구를 발견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비영리 법인 신주쿠 구호센터는 사채, 협박, 폭력 등 온갖 고민과 문제에 사로잡힌 약자들에게
해결책을 제시하는 일본의 마지막 피난처다. 그 역사는 9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몸뚱이 하나만 믿고 어둠의 세계를 누비며 살아온 재일 교포 현수성은 자신의 몸속에
치명적인 불치병 인자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내가 살았다는 증거를 남기고 싶다’라고 생각한 그는
재산도 가족도 다 버리고 윤락촌 한복판에 구호센터 사무실을 차리기에 이른다.
이후 현수성은 채무자, 윤락 업소 여성, 가정 폭력 피해자 등 법치 국가의 손이 닿지 않는
뒷골목 세계의 피해자들을 맨주먹 하나로 구해 냈다.
무려 일만 팔천 명의 사람들이 저곳으로 달려갔고 새 인생을 얻었다.
찾아드는 사람들의 사연도, 맞아 주는 소장의 과거도 드라마틱하기 짝이 없었기에
일본의 매스컴들은 앞다투어 구호센터를 취재했다.
다큐멘터리는 물론이고 해결사 만화로 각색되기도 했다.
나는 신주쿠 구호센터를 취재한 책의 번역을 맡으면서 이곳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현실은 소설보다 기이하다더니, 번역하는 내내 읽고 있는 것이 취재기인지
하드보일드 소설인지 분간이 안 갈 지경이었다.
그러니 내가 현실 속의 구호센터에 한번 찾아가 보고 싶다고 생각하게 된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누구든지 가벼운 마음으로 오라고 권하는 구호센터의 소개 문구도 한몫했다.
그런데 막상 문 앞에 오니 들어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쫓아오는 포주도 빚쟁이도 없는 내가 저곳을 방문해도 되는 것일까.
지난 9년 간 저 문을 두드렸을 일만 팔천 개의 절박한 사연을 생각하니
호기심에 이끌려 무작정 찾아온 자신이 너무 뻔뻔하게 느껴졌다.
그런 내 등을 떠밀어 준 것은 뜻밖에도…….
“여어~ 아가씨, 뭐해? 혼자야?”
거리 헌팅이었다! 8분째 같은 장소에 계속 서 있었더니 낯모르는 아저씨들이 와서
수상쩍은 미소를 띄우며 치근덕거리기 시작한 것이었다. 과연, 이것이 가부키쵸인가!
포주에게 쫓기는 마사지걸도 아니고, 빚 때문에 자살하려는 샐러리맨도 아닌 나는
이름 모를 아저씨의 질문 공세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구호센터에 첫 발을 디디게 되었다.
<신주쿠 구호센터 내부>
짤랑. 문에 매달린 은종이 맑은 소리를 냈다.
“어서 오세요.”
인상 좋은 아주머니가 밝게 인사하며 나를 맞았다.
그러더니 서둘러 실내의 전등을 켰다. 아, 그렇구나. 어쩐지 어두워서 들어오기 어렵다 했더니,
도쿄 절전 때문에 전등불을 반쯤 꺼놓고 있는 중이었다.
카페 테이블이 몇 개 놓인 실내 안에 현수성 소장의 저서와
만화, 영상 프로그램 등이 빼곡히 꽂혀 있었다.
가만, 지금 불을 켠다는 것은…… 지금 손님이 나 하나뿐이라는 건가?
나는 아이스 유자차를 주문한 뒤 피노키오처럼 뻣뻣하게 앉았다.
빨대가 입에 꽂히는지 콧구멍에 꽂히는지 모를 정도로 긴장되었다.
뭘 해야 좋을지 몰라서 서가에 꽂힌 만화책을 읽고 있는데,
옆 테이블에 앉아 있던 아주머니가 봄 햇볕을 받으며 꾸벅꾸벅 조는 것이 보였다.
서비스 정신이 엄격한 일본에서 그런 풍경을 보기는 처음이었다.
덕분에 굳어 있던 뱃속이 점점 누그러졌다.
긴장이 풀리자 입이 열렸다. 알고 보니 나를 맞이한 아주머니도, 다른 종업원도 모두 자원봉사자였다.
우리는 금세 이런저런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센터 안은 거짓말처럼 평온했다.
하지만 아뿔싸, 내게 다가온 스태프가 건네준 책자에는
‘신주쿠 구호센터를 통한 교도소 수감인 갱생 보고서’라고 적혀 있었다.
스태프는 자신의 사례도 그 안에 적혀 있다며 태연하게 웃었다.
<신주쿠 구호센터 소장 현수성>
운 좋게도 바로 첫 방문 날, 원고로만 접했던 소문의 하드보일드 히어로와 마주쳤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사람을 본 순간, 한눈에 누군지 알아볼 수 있었다.
반삭한 머리에 안경을 끼고, 짧게 다듬은 턱수염에 드문드문 흰색이 비쳤다.
그 굵은 팔뚝으로 팔짱을 끼고 등을 젖히면 마치 요새 같은 인상이 풍겨 나온다.
머릿속에서 뜬금없이 「마징가 Z」의 만화 주제가가 들려왔다.
‘기운 센 천하장사 무쇠로 만든 사람~’
“안녕? 한국에서 왔다며?”
한국에서 온 내게 관심을 보인 현 소장은, 구호센터에 한국인들도 꽤 많이 찾아온다고 말했다.
해외에서 의지할 곳이 없는 외국인 역시 사회적 약자인 탓이다.
그 때문인지 구호센터에는 한국인 스태프도 있었다.
이후 역자임을 밝히고 그 유명한 ‘상담실’에서 현 소장을 인터뷰할 기회를 얻었다.
굉장히 이야기하기 편한 사람이었다.
초면인데도 절대 어색한 분위기를 만들지 않고, 하고 싶은 얘기를 굉장히 거침없고 시원시원하게 말한다.
때문에 인터뷰할 때 흔히 머릿속으로 계산하게 되는 생각들,
예를 들면 ‘이 다음에 무슨 화두를 꺼내야 대화가 잘 흘러갈까’,
‘지금 한 얘기는 정리할 때 쳐내는 게 좋겠다’ 등이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너무나 능숙한 리드에 나 같은 초보 인터뷰어는 그냥 떠내려가기도 바빴다.
“세상은 호랑이나 사자만으로는 돌아갈 수 없어. 자칼이나 양도 필요하지.
그런데 모두들 사자가 되고 싶어 하잖아. 뭐, 노아의 방주까진 안 가더라도 골고루 있는 게 좋아.
그런데 사자 외의 동물은 전부 실패자로 보더라고.
거리에서 쓰레기를 청소하는 사람을 천대하는 시선이 있는 한,
이 문제는 해결이 안 돼. 그걸 실패한 인생으로 보는 게 아니라,
처음부터 그것을 목표로 하는 사람도 있는 게 바람직하지.
일본은 장인 정신의 뿌리가 깊어서 아직 그런 사고방식이 통하는 사회거든.
<현수성과 현수성이간다 번역을 맡은 장은선씨>
하긴 다들 사자를 목표로 삼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일지도 몰라.
그렇다면 목표에 도달하지 못하고 떨어진 사람들을 건져 줄 사람이 필요해.
사람들을 도와주는 시스템이 있어야지. 다만 종교 같은 경우,
사람들을 도와주는 대신 종교 자체에 의지하게 만들잖아.
그래선 안 돼. 사람은 원래 자유롭게 태어났으니까, 얽매지 말고 풀어 주어야 해.
그러한 인간성의 회복이 우리 구호센터의 목표야.
가해자도 피해자도 없는 세계에서 모두를 포용하는 것이지.
한국에도 우리 같은 민간 구호센터가 잔뜩 생겼으면 좋겠어.”
나는 이후로도 종종 구호센터를 찾아가게 되었다.
그곳은 내 허세를 버리고 무장해제를 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장소이다.
구호센터에 있으면 엄청난 고통과 무법천지가 세상에 펼쳐져 있음을 끊임없이 깨닫게 된다.
그 앞에서 나는 어리석고 무력하다.
하지만 그래도 괜찮다는 걸, 구원은 항상 존재한다는 걸 신주쿠 구호센터가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깊은 밤, 하늘에 박쥐 전등을 비추어도 배트맨은 오지 않지만,
현수성 소장의 휴대폰은 오늘도 24시간 대기 중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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