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까 일찍 중 한명이 계속 헛소리하던데...
그 일찍 뿐 아니라 다른 일찍도 마찬가지였구만.
대구 사건 4..3사건 모두 이승만이 대통되기 전에 일어난 일이고.대구 사건 때는 이승만이 가택 연금 등 하지와 안 좋은 상태였고 그해 12월에 미국으로 갔어..
근데 이승만이 박상희를?
마치 김구를 이승만이 죽였다는 헛소리보다 더한 무식.저런 것들이 역사를 말하고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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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이 독립 운동가 박상희 죽인거네~?ㅋㅋㅋㅋㅋㅋㅋㅋㅋ
독립운동가 죽인 이승만 시발새끼~ 해봐~ㅋㅋㅋㅋㅋㅋㅋㅋㅋ -
댓글
이놈은 진짜 무식하네.미군정 시기에?이승만은 하지가 경계하고 싫어한 사실도 모르지? 그리고 학살하는 인간들을 보고만 있나? 타지역 경찰이 남로당 박상희가 경찰과 가족 살린 걸 알아? 무식하면 닥치고 있지.왜 알지도 못하고 헛소리를 하냐?
이승만? ㅎㅎㅎ
이승만이는 왜? ㅎㅎㅎ
[백년전쟁 Part 1] 두 얼굴의 이승만- 권해효 나레이션(풀버전)
https://youtu.be/idbhQx10-9A?si=NZMNU9dF_9zsGX2J
이승만 1910~1920년대 행적 증명할 사료 찾았다… 친일 발언 미국인 여교사 감싸고 한인학생 내쳐
https://m.khan.co.kr/national/incident/article/201408120600055/amp
친일 교사 두둔·독립자금 착복 의도... ‘국부’ 이승만의 민낯
https://www.kmib.co.kr/article/view.asp?arcid=0008588244&code=61121111&cp=nv
[김용삼의 현대사 추적] 미 CIA, 백선엽 장군에게 ‘이승만 타도 쿠데타’ 권유
http://www.pennmike.com/news/articleView.html?idxno=19004
비밀 해제 된 미국 외교문서에 의하면 1960년 4월 학생·시민들의 시위 과정에서 미국은 주한 미국대사, 주한미군 사령관, CIA 한국지부장 등을 통해 과도한 간섭과 도를 넘는 압력, 심지어 군부를 움직여 쿠데타를 시행하려 했다. 미국은 이승만 정부를 지원하면서도 한편에선 한국의 지식인, 언론인, 종교인, 정치인들으로 반정부 세력을 형성, 언제든 이승만에 대한 브레이크를 걸 수 있게 만들었다.
“이승만 제거해야…한국군 협력을” 박명림 교수, 미국 비밀자료 공개
https://www.hani.co.kr/arti/politics/politics_general/467967.html
거지 중의 상거지, 해골들의 행진
https://h21.hani.co.kr/arti/culture/culture/2656.html
이승만과 우익청년 테러집단의 ‘국민방위군 학살사건’… 100일 사이에 아군 5만명을 죽이다
[학살된 사람들, 남겨진 사람들③] '부역혐의와 국가보안법 관련 민간인 학살'
http://www.dandi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1201
▲이승만 정부는 왜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을 확대시켰나
“한국전쟁 때 이승만 대통령 CIA 총격 받아”
https://news.kbs.co.kr/news/pc/view/view.do?ncd=1614821
3·15 부정선거와 4·19 혁명
https://www.much.go.kr/webzine/vol39/sub/sub5.html
부정선거의 기획은 광범위하고 구체적이었다.
‘정·부통령은 동일 정당에서 나와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당선돼도 따르지 않겠다’3)는 의견을 밝힌 이승만의 담화문(1960년 2월 13일)은 당시 분위기를 짐작케 한다.
이거 말하는 거야? ㅎㅎㅎㅎ
* 대구10월사건 *
1946년 10월 1일 대구에서 시작된 대규모 시위운동으로 ‘대구 10·1사건’, ‘대구 10월 항쟁’, ‘10월 항쟁’ 등으로도 불린다. 미군정의 식량 정책 실패에 항의하던 대구 시민들의 시위에 대해 경찰이 총격을 가하면서 시위가 무장 항쟁으로 발전했고, 미군정이 계엄령을 선포하며 무력으로 개입하면서 1946년 말까지 남한의 거의 모든 지역으로 시위가 확산되었다.
과거 권위주의 정부 시대에는 조선공산당의 지령과 선동으로 일어났다고 그 의미를 왜곡하여 ‘대구폭동’이라고 불렀으나 2000년대 이후 희생자들의 유족과 지역 언론, 학계의 문제제기가 잇따르면서 2007년부터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의 재조사가 이루어졌다. 그리고 2010년 3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는 <대구10월사건 관련 진실규명결정서>에서 이 사건을 “식량난이 심각한 상태에서 미군정이 친일관리를 고용하고 토지개혁을 지연하며 식량 공출 정책을 강압적으로 시행하자 불만을 가진 민간인과 일부 좌익세력이 경찰과 행정당국에 맞서 발생한 사건”이라고 규정하고, 국가의 책임을 인정해 유족들에 대한 사과와 위령사업을 지원하도록 권고하는 결정을 내렸다. 그래서 오늘날에는 ‘대구10월사건’이라는 명칭이 일반적으로 사용된다.
스티코프 자금·지령 따른 1946년 10월 대구폭동, 시체투쟁 원조
https://www.jayupress.com/news/articleViewAmp.html?idxno=14128
모두 소련지시-소련자금이었다, 총파업-대구폭동진실
https://www.newdaily.co.kr/site/data/html/2011/06/02/2011060200110.html
이거 말하는 거야? ㅎㅎㅎㅎ
* 2·28학생시위에서 3·15마산시민항쟁으로 *
1960년 2월 28일 오후 1시경 대구 경북고 학생위원회 부위원장 이대우가 운동장 조회단에서 결의문을 읽은 뒤 8백여 학생들이 교문을 나서서 “횃불을 밝혀라, 동방의 별들아”, “학원의 자유를 달라”, “학원을 정치도구화하지 말라”, “학원 내에 미치는 정치세력 배제하자” 등의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경북고 학생들의 2·28시위는 새로운 학생운동의 첫출발이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학생들은 이승만 정권이 수립된 이래 학도호국단으로 묶여 권력이 요구하는 관제 시위를 벌였다. 1950년대 내내 북진멸공·반공방일 시위에 동원되었고, 고위 관료가 행차를 해도 연도에 늘어서서 박수를 쳐야 했다. 그런 학생들이 현실을 비판하는 반정부 시위를 벌인 것이다.
교과서에서 왜 대구폭동을 빼버렸나?
https://www.newdaily.co.kr/site/data/html/2014/03/10/2014031000026.html
좌편향 교과서들이 남로당 주도의 4.3 사건을 중점적으로 다루면서 그에 못지 않는 역사성을 가진 남로당 주도의 대구폭동을 뺀 것은 여기에는 좌익에 불리한 사실들이 너무 많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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