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은행(Worldbank)에 따르면 에티오피아는 인구의 절반이 빈곤상태이며 5세 이하의 어린이 47%가 영양실조를 겪고 있습니다. 하지만, 6.25 당시만 해도 강대국으로 불릴 만큼 국제사회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나라였습니다. 하지만 이후 오래도록 지속된 가뭄, 정치적 불안정 등 어려움을 겪으며 최빈국으로 전락하게 되었습니다.
아프리카 대륙 북동부에 위치한 세계 최빈국 에티오피아는 우리와 각별한 인연이 있습니다. 에티오피아는 한국전쟁 당시 아프리카 대륙에서는 유일하게 6,037명의 군인을 파병한 참전국입니다.
에티오피아 수도인 아디스아바바 시내에 위치한 한국마을은 한국전쟁 이후 고국으로 돌아간 참전용사들이 정착해서 살던 마을입니다. 한국마을에 모여살던 참전용사들은 공산화가 되면서 정치적인 핍박을 받게 되었습니다. 남한을 도왔다는 이유였습니다. 정치적 핍박으로 인해 어려운 생활을 하게 된 참전용사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현재 한국마을은 빈민가가 되어버렸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한국마을의 입구에는 한국전쟁에 참여했던 참전용사들이 거주하던 마을이라는 표식으로 태극기가 그려진 이정표가 세워져 있습니다.
에티오피아의 수도 아디스아바바에는 한국마을 말고도 참전용사의 흔적을 찾을 수 있는 곳이 한 곳이 더 있습니다. 바로 에티오피아 참전용사회관입니다.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에티오피아 군인들을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진 한국전 참전용사 기념공원 안에는 한국전쟁과 에티오피아 군의 활약상을 확인할 수 있는 기념관과 참전용사들의 넋을 기리기 위한 기념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공산화를 겪는 과정에서 에티오피아 참전용사는 남한을 도왔다는 이유로 가지고 있던 재산을 몰수당하는 등 수모를 겪었고 가난은 그들의 후손에게 대물림되었습니다. 올해 중학생인 다윗(15,남)의 경우도 마찬가지. 참전용사 3세인 다윗은 아버지를 한 번도 본적이 없습니다. 다윗이 태어나고 아버지가 집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이후 다윗의 가족은 먹고 살길이 막막해 친척집을 전전하다 현재는 하와사(Hawassa)라른 지역의 임대주택에서 살고 있습니다
참전용사인 할아버지의 사진을 들고 있는 다윗
다윗 가족의 생계는 다윗의 엄마가 책임지고 있습니다. 다윗을 낳고 난 후 일용직으로 근무하다가 2년 전에 한 기업의 매표소 직원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매표소 일로는 생활비를 감당할 수 없어 빨래 일을 부업으로 하고 있습니다. 임대료를 제외하면 수중에 들어오는 비용이 한 달 700버르 남짓. 이 돈으로 세 식구는 한 달 동안 먹을 떼프(에티오피아 주식)와 식재료를 사면 금세 동이 난다고 하네요.
단촐한 주방살림
다윗의 엄마는 다윗을 아버지 없이 키울 수밖에 없었던 상황을 설명하며 자녀들을 강하게 키우고 싶었습니다. 다윗의 아버지는 다윗을 낳고 난 후 가족을 버리고 사라졌다고 합니다. 이후 친척집을 전전하며 살아왔지만 자식들에게는 눈물 한 방울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다윗이 어렸을 때 제대로 먹이지 못해서 영양실조에 걸리고 아픈 날이 많았다. 그래서 이모에게 몇 달간 맡기기도 했다.”며 어려웠던 시절을 회상했습니다. 가족을 먹여 살려야 하는 책임감 때문에 마음 놓고 아프지도 못합니다. 공사장에서 일용직으로 일하다 오른손을 다친 적이 있는데, 이때 가족이 모두 먹을 음식을 구하지 못해 힘들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때의 기억은 가족 모두에게 큰 상처로 남아 있습니다
한참 성장기인 다윗은 항상 배가 고픕니다. 학교에서 점심을 먹지 못하면 저녁에 먹는 한 끼가 하루에 먹는 전부일 때도 있습니다. 다윗이 다니는 학교에서는 돈을 주고 급식을 먹거나 도시락을 싸와야 하는데, 점심 도시락을 가지고 가지 못하는 날도 종종 있습니다.
신발이 없어서 고무 슬리퍼를 신고 다닌다고 하네요.
다윗은 “친구들이 학교에 점심 도시락을 싸오거나 급식을 먹는 게 부러워요. 하루에 한 끼만 먹을 때는 무척 배고프지만 열심히 일하시는 엄마에게 투정을 부릴 순 없어요.”라며 어려운 가정형편에도 불구하고 꿋꿋한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할아버지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다윗은 할아버지가 무척 자랑스럽다고 말했습니다.
다윗은 기계 공학자가 되고 싶습니다. 기계 공학을 열심히 공부해서 에티오피아 발전에 크게 기여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대학은커녕 고등학교를 졸업할 수 있을지도 걱정입니다. 학비는 물론이고, 교복, 학용품, 가방 등을 살 수 있는 여력이 안 되기 때문입니다. 평생 세 켤레의 신발만 신어봤다고 말하는 다윗. 앞이 다 벌어진 신발이 어려운 다윗의 경제상황을 가늠케 합니다.
참전용사인 할아버지(외할아버지)메하리 멩게스투(Mehari Mengestu/각뉴부대 1기/별세)에 대해 묻자 한번도 본적도 없고, 다윗이 태어났을 때는 이미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라 기억이 없다는 다윗. 할아버지에 대해 아는 것은 모두 어머니에게 들은 이야기 뿐입니다. 할아버지가 전쟁 당시 귀를 크게 다쳤다는 것. 그리고 에티오피아로 돌아와서도 후유증으로 힘들어하셨다는 사실......,
70여년 전 한반도의 자유와 평화를 지키기 위해 무작정 우리를 도왔던 에티오피아 참전용사와 그의 가족들은 지구 반대편에서 가난의 대물림과 전쟁 후유증으로 고통 받고 있습니다. 생면부지인 대한민국을 위해 죽음을 무릅쓰고 젊음을 희생했던 6.25 참전용사와 후손가족들을 위한 우리의 지속적인 관심이 필요한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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